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레체(Lecce)는 처음엔 그저 작은 도시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 햇살이 돌 위에서 반짝이는 장면을 본 그때부터, 나는 이곳이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빛으로 만든 도시’라는 걸 느꼈다. 레체의 돌은 단단하지 않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햇빛을 머금는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거리를 걷다 보면 돌이 아니라, 시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바람이 골목을 스치고, 햇살이 건물 벽을 따라 흐를 때, 모든 게 하나의 그림처럼 느껴졌다.햇살이 만든 도시, 레체의 첫인상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남부의 태양이 너무 밝았다. 하지만 그 강렬한 빛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걸음을 옮기자마자, 노란빛의 돌담과 하얀 골목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리마다 교회의 첨..
이탈리아의 중심부, 움브리아 지방의 도시 테르니(Terni)는 이름조차 낯선 곳이었다. 로마나 피렌체처럼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낯섦이 마음을 끌었다. 나는 이 도시가 가진 ‘조용한 리듬’을 느끼고 싶었다. 피렌체의 번화한 거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산을 지나고, 작은 시골 마을들을 스쳐 지나갈 때쯤, 창밖으로 초록빛 평야와 오래된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테르니가 단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골목, 테르니의 첫인상기차역을 나서자 공기는 달랐다. 이곳의 공기에는 도시의 소음 대신 오래된 돌길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창문에는 세탁한 ..
그리스의 수많은 섬들 중에서도 카르파토스(Karpathos)는 유난히 조용했다. 산토리니처럼 화려하지도, 미코노스처럼 관광객이 붐비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이 마음을 끌었다. 처음 이 섬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맑고 차분했다. 바람은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머금고 있었고, 멀리서 흰 벽과 파란 창문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 보였다. 에게해의 깊은 푸른빛 속에서, 나는 이 섬이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하나의 ‘리듬’을 가진 공간이라는 걸 직감했다.바람이 불어오는 섬, 카르파토스의 자연카르파토스는 바람의 섬이라 불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그때마다 바다의 색이 달라진다. 오모로스 해변 근처에서 바람이 세게 불 때면,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져 파도 소리가 들판..
그리스 북서부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아폴로니아(Apollonia)는 여행책 속에서도 조용히 숨 쉬는 도시였다. 아테네에서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건, 바람의 냄새였다. 바다와 흙, 그리고 오래된 돌의 향이 섞인 그 냄새는 이 도시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의 한 조각임을 알려주는 듯했다.고요함 속의 고대 유적아폴로니아의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은 그리 크지 않았다. 표지판 하나와 잡초가 무성한 흙길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너진 신전의 기둥,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그리고 아무 소리 없는 하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끝에 닿는 자갈의 소리만이 공기 속에 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