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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호수의 작은 마을 바레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는 말과 이상할 만큼 잘 어울린다. 조용한 호숫가 산책로, 산뜻한 바람, 그리고 적당히 느린 마을의 리듬이 혼자 여행자를 부담 없이 품어준다. 이 글에서는 혼자 바레나를 여행할 때 느껴지는 감정과 실제로 걷고 바라보고 머무르게 되는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 보았다.

바레나

바레나에서 만나는 혼자여행의 여유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감각이 더 섬세해진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어오고, 익숙한 풍경도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곤 한다. 바레나는 이런 ‘혼자여행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주는 곳이었다.

바레나 역에 도착했을 때, 기차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느껴진 건 조용함이었다. 사람은 있지만 붐비지 않고, 풍경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이가 있었다. 역에서 마을 중심으로 내려가는 동안, 가끔 지나가는 현지인의 발걸음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묘하게 귓가에 오래 남았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마을을 걷기 시작했을 때, 혼자라는 사실이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와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도 없고, 어딜 가든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었다. 그냥 지금 눈앞에 있는 풍경이 좋으면 천천히 걷고, 마음이 멈추고 싶으면 그 자리에 서 있으면 된다. 바레나는 그런 자유를 자연스레 허락해주는 곳이었다.

작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니 주인은 당연하다는 듯 “혼자야?”라고 묻지도 않았다. 그 무심한 배려가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혼자여행자에게 가장 편안한 순간은 누가 나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순간이라는 걸, 이 작은 마을이 조용히 알려주는 듯했다.

바레나만의 산책코스에서 느리게 걷는 시간

바레나를 대표하는 산책로인 라르가 비타(La Passeggiata degli Innamorati) 는 혼자 걷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었다. 호수 옆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철제 보행로는 늘 잔잔한 물결과 함께 움직였고, 제가 걷는 발걸음조차 풍경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산책로 초입에서 바라본 호수는 크고 넓기보다는 조용하고 깊었다. 물빛은 햇살에 따라 초록빛과 파랑빛을 오갔고, 바람은 호수를 살짝 건드리며 작은 잔물결을 만들었다. 혼자 걷다 보면 풍경이 더 크게 느껴지고, 마음의 잡음도 조금씩 사라진다. 바레나의 산책로는 그런 정리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선물하는 곳이었다.

산책로 끝에 다다르면 오래된 돌계단과 골목이 기다린다. 골목 안에는 오렌지빛 창틀과 오래된 돌벽이 이어지고, 가끔 창문 너머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온다. 길이 너무 좁아 두 사람이 마주 오면 비켜줘야 하는데, 혼자여서인지 그런 순간도 수월했다. 여행 중 혼자라는 건 불편함이 아니라 오히려 움직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다가 작은 벤치를 발견해 앉았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호수와 마주한 채 조용히 숨을 골랐는데, 그 몇 분이 묘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아무 일도 없고, 오직 내가 바라보는 풍경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호수뷰가 전해주는 감정의 깊이

바레나의 가장 큰 매력은 호수뷰다. 하지만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비워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혼자 있을 때만 느껴지는 감정의 결이 호수 풍경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 때문일 것이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호수는 낮의 투명함에서 점점 은빛으로 변했다. 건너편 산봉우리 뒤로 햇빛이 천천히 사라지며 하늘은 보랏빛과 금빛을 섞어 조용하게 물들었다. 그 순간을 바라보고 있는데, 주변의 작은 소리들—물결이 철제 난간에 닿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배의 엔진 소리, 그리고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묘하게 조화로워졌다.

혼자 보는 풍경은 함께 보는 풍경과 다르다. 누구와 공유하지 않는 대신,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된다. 바레나에서는 그 ‘나만의 풍경’을 하루에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가끔은 마음 한쪽이 찡해질 만큼 아름다웠고, 가끔은 조용히 머무르고 싶을 만큼 차분했다.

호숫가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식탁 위 촛불이 흔들리는 모습, 와인 잔에 비친 호수의 빛,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모두 자연스럽게 배경이 되었다. 혼자지만 외롭지 않고, 조용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의 균형이 바레나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바레나에서 보낸 하루는 조용하지만 깊었다. 혼자 걷는 발걸음은 더 가벼웠고, 바라본 풍경은 더 진하게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지나쳤을 장면과 감정들이, 혼자였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다가온 것이다. 바레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자를 자연스럽게 품고, 부담이나 어색함 대신 고요한 여유를 선물한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진다면, 나는 또다시 바레나를 향해 갈 것 같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그 길 위에서, 호수와 바람이 들려주는 조용한 이야기를 다시 듣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