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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의 얇고 기다란 해안선을 따라 자리한 리구리아는, 지중해 바람이 가장 부드럽게 스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화려함이나 거대함으로 승부하는 도시가 아니라, ‘그냥 하루를 머물러도 마음이 가라앉는 곳’으로 기억되는 그런 여행지다. 나는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리구리아에서의 하루 동안 온몸으로 느꼈다. 그날의 공기, 빛, 바람, 그리고 마을들이 주는 잔잔한 위로는 지금도 손에 닿을 듯 생생하다.

조용한 아침, 바다 냄새가 스며드는 골목을 걷다
리구리아의 아침은 도시보다 훨씬 간결하고, 훨씬 느리다. 숙소 창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짠 바람에 먼저 놀랐고, 골목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말랑해졌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작은 바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 주문하고 길가에 서서 홀짝였다. 이탈리아어로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섞여 들려왔지만, 그 소리조차도 바람에 묻혀 부드럽게 퍼졌다. 아침의 리구리아는 누가 일부러 만들어둔 무드가 아니라, 그저 매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한 장면 같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색색의 집들이 기울어진 듯 이어져 있었다. 벽은 오래되어 거칠지만, 그마저도 이 마을의 정체성처럼 편안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수록 바다 냄새가 짙어지고, 파도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처음엔 여행자의 귀라 더 민감하게 들린 건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이 소리는 늘 선명했다.
지중해와 마주한 산책로, 아무 이유 없이 걷게 되는 시간
바다와 가장 가까운 산책로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친퀘테레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도 있지만, 리구리아라는 지역 전체는 넓고 조용한 구간이 많다. 나는 특별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파도는 큰 소리를 내기보다 리듬감 있게 돌길을 두드렸고, 햇빛은 물 위에서 반짝이며 춤추듯 일렁거렸다.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걷다 보니 마음 한쪽이 조금씩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를 따라 내려가는 길 곳곳에서 현지인들이 의자를 밖으로 꺼내놓고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벤치에 앉아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리구리아에서는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채워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꽉 차는 그런 순간들 때문에 그렇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은 작은 부두 끝에서 혼자 파도를 바라보던 때였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머릿속은 이상할 만큼 맑아지고 생각이 가벼워졌다. 애써 정리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잊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바람과 파도 소리만으로 마음이 덜 무거워진 경험은 여행을 하며 처음이었다.
노을이 물드는 리구리아, 마음 깊은 곳이 따뜻해지는 저녁
저녁 무렵이 다가오면 리구리아의 바다는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낮에는 투명한 파란빛이었다면, 해가 낮게 떨어질수록 바다는 금빛과 주황빛을 뒤섞으며 흔들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눈으로 다 잡아두고 싶어 사진을 찍게 되는데, 솔직히 사진보다 눈으로 보는 순간이 훨씬 아름답다. 나는 호숫가 레스토랑에 들어가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혼자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는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식당 직원도, 주변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오히려 혼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여행자를 자연스럽게 하나의 풍경처럼 받아들였다. 해산물 파스타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고, 서서히 어두워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식사를 했다. 파스타의 풍미가 너무 풍부해서 몇 번이고 감탄했고, 와인의 시원한 매끄러움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맛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오며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아… 여기 오길 잘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만으로도 그날의 감정이 충분히 설명되는 것 같았다. 음식을 다 먹고 난 뒤에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바다는 이미 밤의 색으로 변해 있었지만 잔잔하게 출렁이며 여전히 나를 붙잡는 듯했다.
리구리아에서의 하루는 조용한데도 지루하지 않고,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마음에 오래 남는다. 삶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 잠시 쉬고 싶을 때, 이 지역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곳이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여행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