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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카라는 도시는 처음엔 그저 지나치는 이름이었다. 도쿄나 센다이처럼 화려하지 않고, 관광책자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그 이름에 머물렀다. ‘모리오카.’ 어쩐지 부드럽고 느리게 흘러갈 것 같은 소리였다. 그래서 도호쿠 여행 중 하루를 비워 그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참 잘한 일이었다.
북쪽의 작은 도시, 첫인상은 ‘고요함’
센다이에서 신칸센을 타고 두 시간을 달리면 모리오카에 도착한다. 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확실히 달랐다. 도시의 중심인데도 공기가 묘하게 깨끗했다. 역 앞 광장은 조용했고, 사람들은 바쁘지 않게 움직였다. 어떤 노인이 천천히 자전거를 타며 지나갔고, 고등학생들은 웃으며 빵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이게 진짜 도시의 평화구나.’ 모리오카의 거리는 소박했다. 큰 네온사인도, 요란한 간판도 없었다. 대신 오래된 찻집과 작은 서점, 수제 공방이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한 찻집에 들어가 따뜻한 녹차를 주문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겨울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혀 잔잔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행이란, 어쩌면 이런 조용한 순간을 만나기 위한 게 아닐까 싶었다.
모리오카의 강, 그리고 시간의 흐름
모리오카의 중심에는 기타카미강(北上川)이 흐른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 강은 마치 도시의 숨결 같다. 나는 오후에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강물은 잔잔했고, 물 위로 갈매기 몇 마리가 떠 있었다. 멀리 눈 덮인 이와테산(岩手山)이 보였다. 거대한 산은 묵묵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모습이 이상할 만큼 든든했다. 강변에는 나무 벤치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거기 앉아 간단히 편의점에서 산 오니기리를 먹었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햇살이 따뜻해서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주변에는 연인들이 산책하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도 잠시 이 도시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강 위의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도시 한가운데임에도 자연이 그대로 숨 쉬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도시의 소음보다 자연의 숨소리가 더 큰 곳”, 모리오카는 바로 그런 도시였다.
사람이 만든 따뜻함, 모리오카 냉면의 이야기
모리오카에 왔다면 반드시 맛봐야 할 게 있다. 바로 모리오카 냉면이다. 사실 한국식 냉면에서 유래된 음식이라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먹어보니 전혀 다른 매력이 있었다. 쫄깃한 면발 위에 고기 육수와 매콤한 양념, 그리고 달콤한 배와 수박이 올려져 있었다. 차가운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냉기의 향이 여름에도, 겨울에도 묘하게 어울렸다. 식당 주인은 “이건 한국에서 온 음식이지만, 이제는 모리오카 사람들의 맛이에요.”라며 미소 지었다. 그 말이 참 인상 깊었다. 다른 곳에서 온 문화가 이곳의 삶 속에 스며들어, 이제는 ‘자기 것’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도시가 성장하는 방식 아닐까 싶었다. 냉면을 한입 베어 물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모리오카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은 음식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온기가 내 속까지 천천히 퍼져나갔다.
모리오카의 밤, 조용한 불빛 아래에서
해가 지고 나면 모리오카의 거리는 더 고요해진다. 거리의 상점들이 하나둘 불을 끄면, 남은 건 노란 가로등 불빛뿐이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외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모든 소음이 잠시 멈춘 듯했다. 나는 숙소 근처 작은 바에 들렀다. 바텐더가 추천해준 현지 사케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옆자리에서는 중년 남성이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번졌다. 바깥에는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도시의 매력은 요란한 볼거리에 있지 않았다. 그냥 ‘사람의 온기’ 그 자체였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남는 온기
모리오카를 떠나기 전날, 기타카미강 위의 다리에서 마지막으로 석양을 봤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강물에 반사된 빛이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이 도시가 내 마음 한편에 오래 남을 거란 걸 알았다. 모리오카는 조용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따뜻한 온기로 채워져 있다. 사람들의 인사, 천천히 흐르는 강, 눈 덮인 산의 실루엣, 그리고 한 그릇의 냉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런 도시에서라면 오래 머물러도 좋겠다.” 관광지가 아닌, ‘살아 있는 도시’. 모리오카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여행이 끝나도 그 평화로운 리듬이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