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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북부,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 한가운데 자리한 도시 파르마(Parma). 솔직히 처음엔 이곳이 이렇게 매력적인 곳일 줄 몰랐다. 피렌체나 베네치아처럼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라서 큰 기대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담백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느껴진 건 ‘고요함’이었다. 사람들은 급하지 않았고, 거리에는 여유로운 공기가 흘렀다. 도시 전체가 햇살에 물든 듯 따뜻했고, 나는 그 순간부터 천천히 이곳의 리듬에 맞추기로 했다.
파르마는 미식의 도시로 유명하다. 특히 파르마 햄(Prosciutto di Parma)과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Parmesan 치즈)는 이곳의 자부심이다. 첫날 점심, 작은 트라토리아에 들어가 햄과 치즈가 올려진 파스타를 주문했다. 접시가 눈앞에 놓이자마자 코끝을 자극하는 짙은 향이 퍼졌다. 짠맛과 고소함이 입안에 퍼지면서, 그동안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옆 테이블의 노부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파르마 치즈는 천천히 녹여 먹는 게 제일 좋아요”라고 조언해줬다. 그렇게 낯선 도시에서 따뜻한 인사를 받는 순간, 여행의 시작이 진짜로 느껴졌다.

도시의 중심에서 느낀 예술의 향기
점심을 마치고 향한 곳은 파르마 대성당(Duomo di Parma). 겉모습은 단정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었다. 천장 가득히 펼쳐진 르네상스 시대의 프레스코화가 나를 압도했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색감, 그리고 천정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나는 성당 한가운데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만든 아름다움이 이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조용하게 흔들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울림이 밀려왔다.
성당 밖으로 나오니 바로 옆에 있는 ‘바티스테로(Battistero)’의 분홍빛 대리석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 빛을 보며 ‘이 도시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도 예술을 호흡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거리의 음악가가 연주하는 첼로 소리가 광장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곳의 모든 풍경이 하나의 음악처럼 느껴졌다. 소리와 냄새, 빛이 어우러진 조화로움. 아마 그게 파르마의 매력일 것이다.
사람의 온기를 느낀 골목길
파르마의 골목은 넓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도시의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다. 노란색, 붉은색, 회색빛으로 칠해진 벽들이 햇살 아래서 따뜻하게 빛났다. 그 골목을 걷다 보면 꼭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가끔은 창가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작은 제스처 하나에도 이 도시는 정이 가득했다.
오후에는 작은 치즈 공방을 방문했다. 유리창 너머로 장인이 치즈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의 손놀림이 마치 예술가 같았다. “좋은 치즈는 기다림에서 나온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20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치즈를 숙성시켜 왔다고 했다. 나는 시식용으로 잘라준 조그만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맛, 그리고 미묘한 단맛이 뒤따랐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이 도시가 쌓아온 시간의 맛이었다.
파르마의 저녁, 그리고 느리게 흐르는 시간
해가 질 무렵, 나는 ‘파르코 두칼레(Parco Ducale)’라는 공원으로 향했다. 강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붉게 물들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벤치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그날 하루를 떠올렸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하루였다. 파르마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른다. 심지어 바람조차도 여유롭다. 그 여유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 ‘이렇게 단순한 행복이 있었지.’
저녁은 현지인이 추천해준 작은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파르마 햄과 치즈, 그리고 레드 와인 한 잔. 주인은 내게 “여행자는 도시의 맛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와인의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이 도시의 사람들과 풍경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 불빛이 벽에 비치며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조용히 걸었다. 파르마의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오늘 만난 사람들, 거리의 음악, 그리고 그 향기까지. 그 모든 것이 ‘온기’로 남았다.
파르마를 떠나기 전날, 창문을 열고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먼 곳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골목 아래에서는 빵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 장면을 마음속에 담으며 속삭였다. “파르마, 고마워. 너는 내 여행의 가장 조용한 선율이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