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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중심부, 움브리아 주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도시 페루자(Perugia). 로마나 피렌체에 비하면 조용하고 덜 알려진 곳이지만,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진짜 ‘이탈리아의 숨결’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페루자를 찾은 건 늦여름 오후였다.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순간, 역 앞의 언덕길을 오르며 ‘아, 여긴 천천히 걸어야 하는 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루자는 도시 전체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길 하나하나가 오르막과 내리막이다. 돌로 깔린 좁은 골목을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에 오래된 시간들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골목 양옆으로는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이어졌고, 그 위로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 앞에 화분을 가득 늘어놓은 집도 있었고, 창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공기 중에 가볍게 떠돌았다. 그 순간, ‘이 도시에서는 소음조차 음악처럼 들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페루자

골목 끝에서 마주한 평화로운 오후

페루자 중심부로 향하는 길, 비탈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코르소 반니치(Corso Vannucci)’라는 번화한 거리로 이어진다. 그곳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공간이었다. 젤라또를 들고 천천히 걷는 연인들, 햇살 아래서 담소를 나누는 노부부, 그리고 골목 모퉁이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거리 음악가까지. 모두가 이 도시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듯했다.

나는 그날 오후, 한 카페에 들어가 창가 자리를 차지했다.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코끝을 스쳤고, 눈앞에는 석양빛으로 물들어가는 페루자의 지붕들이 펼쳐졌다. 붉은 기와들이 햇살을 받아 주황빛으로 반짝였고, 멀리 보이는 언덕 위 성당의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그 순간,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이름난 명소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조용한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중세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골목

카페를 나와 ‘로카 파올리나(Rocca Paolina)’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16세기 교황령 시절 지어진 요새로, 도시의 밑부분에 자리한 거대한 석조 통로들이 인상적이다. 지금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어 걸어서 통과할 수 있는데, 그 안을 걷다 보면 마치 중세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촛불 같은 조명이 벽면을 비추고, 오래된 돌계단 사이로 사람들의 발소리가 울린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벽을 손끝으로 스쳤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자 석양이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페루자의 풍경은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도심이 아닌, 평범한 가정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늘로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주변의 관광객들도 말없이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시간, 그 자체가 여행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밤이 내린 페루자, 그리고 여운

저녁 무렵, 거리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낮의 햇살이 사라진 자리에는 따뜻한 노란 조명이 골목을 물들이고, 와인바와 레스토랑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작은 트라토리아에 들어가 와인 한 잔과 파스타를 주문했다. 주인 할머니가 직접 만든 토마토소스는 짙은 향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페루자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도시죠?’라고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는 정말 모든 것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흘러갔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다시 한번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용한 골목, 오래된 돌벽, 그리고 그 위로 떠 있는 달빛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진짜 여행의 기억은 화려한 사진 속이 아니라, 이런 고요한 밤공기 속에 남는다는 것을.

페루자에서의 하루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하루가 내 마음 속 어딘가를 오랫동안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언젠가 다시 그 언덕길을 걷게 된다면, 나는 또다시 같은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할 것이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춰, 조용히 속삭이겠지. “이곳에 다시 돌아왔구나.”

페루자는 나에게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알려준 도시였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 그 느릿한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여행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