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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타알타의 숨결, 중세가 아직도 살아 있는 길을 걷다
베르가모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왜 더 일찍 오지 않았을까?” 이탈리아 여행을 여러 번 했으면서도 베르가모는 항상 ‘밀라노 근교의 조용한 도시’ 정도로만 알고 지나쳤다. 그런데 케이블카를 타고 치타알타(Città Alta)로 올라가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붉은 지붕들, 성벽을 따라 감싸 오르는 초록빛 언덕, 그리고 중세의 도시가 그대로 확장된 듯한 풍경이 정말로 그대로 펼쳐졌다. 마치 오래된 시간의 문을 열고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베르가모의 매력은 요란하지 않다. 대신 천천히 스며든다. 치타알타에 도착해 첫 발을 옮기면 돌바닥이 “톡톡” 소리를 내며 신발을 받쳐 준다. 그 소리가 묘하게 고요한데, 동시에 사람 사는 기척이 느껴진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카페에서 아침 준비를 하는 직원의 냄새가 풍기고, 창틀에 기대어 화분을 만지작거리는 아주머니도 보인다. 여행지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비아 고메즈(Via Gombito)를 따라 올라가다 만난 작은 성당이었다. 관광객이 몰리지 않아 안쪽은 텅 빈 듯 조용했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공간을 단단하게 채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숨소리마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중세 유럽의 도시가 품고 있는 그 묵직함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치타알타의 골목은 방향감각을 잃기 딱 좋다. 그러나 베르가모에서는 길을 잃어도 괜찮다. 오히려 길을 잃는 순간이 진짜 이 도시를 알아가는 순간이 된다. 구석구석 숨어 있는 돌계단, 익숙한 듯 낯선 회색 건물들, 마을 사람들이 일상처럼 오가는 작은 가게들까지—이 모든 것이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책처럼 펼쳐진다. 그 골목을 걷는다는 건 페이지를 넘기며 과거의 숨결을 만나는 일이었다.

2. 베르가모의 전망,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 순간의 감정
베르가모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포르타 산 자코모(Porta San Giacomo) 근처 성벽 위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던 시간이다. 처음엔 단순히 “전망 좋다더라”는 말만 듣고 갔는데, 실제로 서보니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성벽 아래로는 치타바사(Città Bassa)의 현대적인 도시 모습이 펼쳐지고, 그 뒤로는 밀라노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평야가 펼쳐진다. 그런데 풍경 자체보다 더 강하게 남는 건 ‘그 풍경을 마주한 순간의 감정’이었다. 바람은 부드럽게 불었다. 겨울 끝자락이었지만 햇빛은 따뜻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책을 읽고, 어떤 커플은 손을 잡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어떤 여행자는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기도 했다. 도시가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바쁜 삶에서 벗어나 잠깐 멈춰 설 수 있는 공간, 그것이 베르가모였다. 나는 성벽 위에서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도시 전체가 바람에 흔들리며 빛을 반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물처럼 느껴졌다. 여행을 다닐 때면 흔히 ‘예쁘다’라는 감정이 먼저 떠오르지만, 베르가모에서는 ‘편안하다’가 먼저 찾아왔다. 설명하기 힘든 종류의 평온함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길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길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며 오래된 벽면에 금빛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문득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상상됐다.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장바구니를 들고 구불구불 내려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성벽 위에서 사랑을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지는 결국 그 장소의 이야기에 우리가 살짝 걸쳐 보는 장소다. 베르가모의 전망은 단순히 “예쁜 풍경”을 넘어, 그 이야기 속에 잠시 머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잠시의 머무름이 내 마음을 꽉 채웠다.
3. 역사 속을 걷는 기분, 베르가모가 특별한 이유
베르가모의 역사는 단순히 오래된 건물 몇 개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섞인, 조금 특별한 리듬을 갖고 있다. 치타알타의 중심광장인 피아차 베키아(Piazza Vecchia)에 들어서면 그 느낌이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광장은 크지도 않지만 어디서든 눈길을 끄는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오래된 시청사, 아기자기한 도서관, 그리고 분수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모여 있는 사람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 도시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느낌이 든다. 한참을 광장에 앉아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을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처럼 대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분수 주변에서 뛰어놀고, 어르신들은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베르가모는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특히 콜레오니 예배당(Cappella Colleoni)은 베르가모의 역사적 자부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화려한 대리석 문양과 독특한 조각들이 건물 전면을 꽉 채우고 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중세 장인의 손길이 지금도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배당 내부는 더 놀라웠다. 작은 공간인데도 색감과 조각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어, 마치 성벽 안쪽에 숨겨둔 보물창고 같은 분위기였다.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성당 벽면의 그림들을 천천히 바라보면 좋다. 처음엔 그냥 장식 같지만 자세히 보다 보면 당시 사람들의 감정, 시대적 분위기, 신앙의 무게가 아주 조심스레 묻어 나온다. 여행 중이었음에도 왜인지 가만히 숨을 죽이게 되는 공간이었다. 베르가모가 특별한 이유는 화려함보다 ‘깊이’를 가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쌓아 올린 성벽과, 그 위에서 이어지는 일상의 조각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흐르고 있는 삶의 리듬까지—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역사와 현재가 어우러진 풍경을 만든다. 나는 이 도시를 떠날 때 한 가지를 확신했다. “베르가모는 보는 곳이 아니라, 느끼는 곳이다.” 언젠가 또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남는 도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