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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남쪽 끝자락, 사람들이 자주 지나치는 그 경계선쯤에 교난마치가 있다. 이름조차 낯선 이 마을은 교토의 유명 관광지들과 달리, 지도 위에서도 조용히 숨어 있다. 나는 어느 겨울 아침, 일부러 그 조용함을 찾아 교난마치로 향했다.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거리 대신, 오직 바람과 산의 냄새만 있는 그곳이 궁금했다. 그렇게 전철을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쯤 내려가자, 창밖 풍경이 서서히 달라졌다. 건물은 낮아지고, 논과 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의 소음이 점점 멀어지면서 마음속에 이상한 평화가 번졌다.
교난마치의 첫인상, 느리게 깨어나는 마을의 아침
역을 나서자마자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한겨울이었지만, 차가운 공기 속에 묘하게 따뜻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동네 제빵집에서 막 구워낸 식빵 냄새였다. 조그만 상점 앞에서는 노부부가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옆집에서는 고양이가 햇살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모든 장면이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가로수 아래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멀리서 아이들이 등굣길에 나서며 웃음소리를 남겼다. 도시에서는 잊고 살던 ‘아침의 여유’라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길 한가운데에는 작은 신사가 있었다. 이름은 ‘야스이신사’. 들어서자 신사 특유의 냄새, 나무와 향이 섞인 고요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경내에는 하얀 종이에 소원을 적어 매단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바람에 종이들이 살짝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사람들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각자의 바람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내는 듯했다. 나도 그 나무 앞에 서서 잠시 두 눈을 감았다. 특별한 기도를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이 고요함이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미소
점심 무렵이 되자, 마을은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오래된 찻집 문이 열리고, 따뜻한 증기가 창문을 가득 채웠다. 나는 작은 간판이 달린 다방 ‘코히야 모리’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오래된 목재 테이블과 아날로그 시계, 그리고 책 몇 권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게 따뜻한 커피를 내주며 물었다. “관광객이세요? 교난마치까지 오신 분은 오랜만이에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왔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짧은 소설 같았다.
“여긴 큰 변화가 없어요. 세상이 빨라져도, 여긴 그냥 이렇게 흘러가죠. 그게 좋기도 하고, 가끔은 외롭기도 해요.”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커피 향기와 함께 퍼지는 시간의 냄새. 나는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고양이가 그 뒤를 따라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게 이상하게도 좋았다. 도시의 자극적인 풍경보다, 이런 평범함이 훨씬 더 진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산책로 끝에서 만난 저녁, 그리고 마을의 숨결
오후에는 교난마치 외곽의 언덕길로 향했다. ‘다카야마 전망대’라는 표지판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 옆으로는 감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말린 감이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겨울 햇살이 감 껍질에 닿을 때마다 반짝였고, 그 모습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언덕길은 생각보다 가팔랐지만, 정상에 오르자마자 그 모든 피로가 사라졌다. 멀리 교토 시내가 희미하게 보였고, 그 아래로는 잔잔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귀에 살짝 찬 공기가 닿았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상하게 포근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해질 무렵, 나는 마을로 다시 내려왔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집집마다 창문 안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거리에는 된장국 냄새, 생선 굽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하루의 끝, 사람들의 일상이 모여 만들어내는 향기였다. 그 평범한 냄새들이 오히려 가장 진한 기억으로 남는다. 역으로 돌아가는 길, 작은 슈퍼 앞에서 다시 그 노부부를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 오면 더 예뻐요. 다음엔 꼭 겨울에 오세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 깊이 박혔다.
조용함 속에서 배운 것들
교난마치에서 보낸 하루는 특별한 관광지도, 화려한 음식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건 오히려 그런 ‘없음’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하루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진짜 여유를 느꼈다. 도시에서 항상 무언가를 쫓던 내가, 처음으로 멈춰 서서 숨을 고른 시간이었다. 교난마치의 조용함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사람과 풍경이 함께 만들어내는 따뜻한 리듬이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환했다. 다음 역마다 지나치는 불빛들이 마치 누군가의 삶처럼 느껴졌다. 교난마치는 그런 곳이었다.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마을. 언젠가 다시 그 느림의 리듬이 그리워질 때, 나는 아마 또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도 아마, 같은 빵 냄새가 골목을 채우고 있겠지.
무료 이미지 참고: https://pixabay.com/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