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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의 아침은 늘 부드럽다. 햇살은 짙지 않고, 바람은 살짝 포도밭을 스치며 지나간다. 피렌체에서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 그 끝에 산지미냐노(San Gimignano)가 있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중세의 성벽 도시, ‘탑의 도시’라 불리는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돌길 위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뜻했고,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왔다. 도시의 첫인상은 조용하지만 강렬했다. 오래된 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역사와, 그 속에 살아 있는 오늘의 냄새가 있었다.

산지미냐노
돌계단을 오르며, 천 년의 시간 속으로
성문을 지나 언덕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 아래로는 울퉁불퉁한 돌길이 이어지고, 양옆으로는 아담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죽 가게, 와인샵, 그리고 젤라토 가게들. 그중 ‘젤라테리아 도론델리(Gelateria Dondoli)’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세계 챔피언 젤라토라던데, 나도 호기심에 줄을 섰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 가득 달콤한 우유 향과 신선한 레몬의 산미가 퍼졌다. 그 순간, 입안이 아니라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 “여행은 혀로 기억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젤라토를 들고 광장으로 향했다. 산지미냐노의 중심, ‘피아짜 델라 치스테르나(Piazza della Cisterna)’. 삼각형 모양의 이 광장은 돌로 포장되어 있고,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현지 아이들이 비둘기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로 향했다. 도시 곳곳에서 하늘로 솟은 탑들이 보였다. 마치 서로 누가 더 높이 닿을 수 있는지 겨루듯, 당당히 서 있었다. 옛날에는 귀족들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 한다. 지금은 그 탑들이 산지미냐노의 상징이 되었고, 도시의 기억을 지탱하는 기둥처럼 남아 있었다.
탑 위에서 바라본 토스카나의 오후
나는 그중 가장 높은 ‘그로사 탑(Torre Grossa)’으로 향했다. 입장료를 내고 좁은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오래되어 삐걱거렸고, 중간중간 숨이 찼지만, 이상하게도 그 느린 걸음이 좋았다. 탑 위에 도착하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 초록빛 포도밭, 붉은 지붕들의 마을이 그림처럼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그 바람에 포도향과 풀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고,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한 장의 풍경 안에서 겹쳐지는 듯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스며들었다. 어떤 도시는 사람을 서두르게 만들지만, 산지미냐노는 오히려 멈추게 했다. 그 멈춤 속에서, 나는 진짜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체크리스트처럼 도시를 소비하던 내가,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석양의 와인 한 잔, 그리고 마을의 저녁
탑에서 내려와 골목을 걷다 보니, ‘엔오테카(Enoteca)’라는 작은 와인 바가 눈에 들어왔다. 현지산 ‘베르나치아 디 산지미냐노(Vernaccia di San Gimignano)’를 권하길래 한 잔 시켰다. 잔을 기울이자 황금빛 액체가 햇살을 머금고 반짝였다. 첫 모금은 상큼했고, 끝에는 은근한 쓴맛이 남았다. 창밖으로는 석양이 마을의 지붕을 물들이고 있었다. 붉은 벽돌들이 금빛으로 빛나고, 거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때였다. 가게 주인이 말했다. “이 시간에 마시는 와인이 제일 좋아요. 하루가 천천히 사라지는 걸 볼 수 있거든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풍경은 마치 오래된 회화처럼 고요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향하고, 노점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가게 안은 은은한 재즈가 흘러나왔고, 와인은 부드럽게 목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그 순간, 시간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도시는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이곳에서는 하루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루가 태어나는 것 같았다.
밤의 산지미냐노, 고요 속의 숨결
어둠이 내리고, 골목의 돌길 위로 노란 조명이 켜졌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탑의 그림자가 벽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기 전, 광장에 다시 들렀다. 낮에는 북적이던 그곳이 이제는 고요했다. 우물 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탑 사이로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조용한 깨달음이 스쳤다. ‘이 도시는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재’라는 것. 천 년 전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군가 나처럼 하늘을 올려다봤을 것이다. 그 생각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떠나는 아침, 다시 현실로
다음 날 아침, 버스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뒤돌아봤다. 산지미냐노는 안개 속에 반쯤 숨어 있었다. 탑들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서 있었고, 마을의 종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여행이 끝나면 늘 약간의 허전함이 남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곳은 단순히 ‘봤던 곳’이 아니라 ‘머물렀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언젠가 다시 올게요, 산지미냐노.” 버스 창문에 맺힌 빛이 흔들릴 때, 마음 한켠에서 작은 온기가 피어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