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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의 아침은 공기가 다르다. 조금 더 차갑고, 조금 더 정제된 느낌이 있다. 피에몬테주의 중심 도시, 토리노(Torino)는 그런 공기를 품고 있는 도시였다. 밀라노의 화려함도, 로마의 고대스러움도 아니었다. 그 대신 도시를 감싸는 것은 고요한 품격과 여유였다. 첫발을 내디딘 순간, ‘이곳은 서두르지 않는 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리노는 처음부터 그렇게, 나를 천천히 맞이했다.
광장과 아케이드, 걷는 순간이 여행이 되는 도시
토리노의 중심, ‘피아차 카스텔로(Piazza Castello)’는 도시의 심장 같은 곳이었다. 사방으로 뻗은 아케이드를 따라 걷는 사람들, 커피 향이 새어 나오는 카페, 그리고 정장을 차려입은 토리노 시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유럽의 다른 도시보다 더 단정하고 차분했다. 나는 카푸치노 한 잔을 들고 광장 가장자리 벤치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와 겨울 공기가 섞여 들어오며 코끝을 간질였다. 주변에서는 노인들이 신문을 읽고,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그 자체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토리노는 ‘멋’이라는 단어를 억지로 만들지 않는 도시였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아했다.
광장을 벗어나 조금 걸으면 ‘비아 로마(Via Roma)’가 이어진다. 이 길은 토리노의 상징 같은 거리다. 고전적인 아케이드가 길게 이어지고, 고급 부티크와 서점, 카페가 늘어서 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서적을 구경하다가, 어느 작은 책방에 발을 들였다. 주인은 백발의 노인이었고, 영어보다 손짓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게 오래된 지도책을 건네며 “이건 토리노의 옛 도로가 아직 그려진 지도야”라고 말했다. 책을 넘기니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그 냄새 속에서 나는 이 도시의 과거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초콜릿과 카푸치노, 그리고 사람의 온도
토리노는 ‘초콜릿의 도시’로 불린다. 18세기부터 이어져 온 초콜릿 문화는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이다. 그중에서도 ‘비체린(Bicerin)’이라는 음료가 유명하다. 초콜릿, 커피, 우유가 세 층으로 나뉘어 잔에 담긴 음료다. 나는 현지인 추천으로 ‘카페 알 비체린(Caffè Al Bicerin)’을 찾았다. 낡은 나무문을 열자, 오래된 카운터와 유리잔들이 반짝였다. 커피 향보다 진한 초콜릿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주문한 비체린이 나왔을 때, 그 온도가 마음까지 따뜻하게 했다. 숟가락으로 살짝 저어 마시자, 달콤함과 쌉쌀함이 동시에 입안에서 녹았다. 그 맛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토리노의 기분’이었다. 옆자리에서는 노부부가 손을 잡고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둘 사이에는 익숙한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종종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찾아온다. 토리노의 공기는 따뜻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따뜻했다.
포 강변과 언덕 위의 성당, 도시를 바라보는 시간
오후가 되자 하늘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포 강(Po River)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강 위에는 가벼운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고, 멀리서는 알프스의 설산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풍경은 이탈리아답지 않게 차분하고, 스위스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다리를 건너 조금 더 오르니, ‘몬테 데이 카피치(Monte dei Cappuccini)’ 언덕이 나왔다. 그 위의 작은 성당에서 토리노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도시 전체가 붉은 지붕으로 덮여 있고, 그 한가운데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가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었다. 그 건물은 토리노의 상징이다. 영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위에서 보면 마치 도시가 그 건물을 중심으로 호흡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언덕 난간에 기대어 한참을 내려다봤다. 바람은 조금 차가웠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여행이란 결국 이런 순간을 찾는 일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고,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시간 말이다.
저녁의 토리노, 빛으로 물드는 거리
해가 지자 토리노의 거리는 다시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아케이드 아래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돌바닥이 은은히 반사되었다. 거리마다 와인바와 트라토리아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엔오테카’ 한 곳에 들어가 현지 와인 한 잔을 시켰다.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피에몬테 와인은 향이 깊어요”라고 말했다. 잔을 기울이자 붉은 와인이 부드럽게 퍼졌다. 그 향 속에는 토리노의 기품이 담겨 있었다.
옆자리의 청년이 말을 걸었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토리노는 조용하지만, 그게 바로 매력이에요. 사람도, 거리도, 시간이 천천히 흐르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토리노는 빠르지 않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 정직한 아름다움이 있다. 도시가 나를 설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게 만드는 힘. 그것이 이 도시의 품격이었다.
떠나는 아침, 그리고 남은 여운
마지막 날 아침, 창밖으로 안개가 내려앉은 토리노의 거리를 바라봤다. 어제 걸었던 비아 로마, 카페 알 비체린, 그리고 포 강이 모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도시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여행은 결국 ‘리듬’을 배우는 일 같다. 토리노는 내게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리듬을 가르쳐줬다. 바쁜 도시 속에서 잊고 있던 여유, 그 한 조각이 이곳에서 다시 내 안으로 돌아왔다.
버스가 역을 떠날 때, 창밖의 몰레 안토넬리아나가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풍경은 점점 더 선명하게 남았다. 마음속에 각인된 도시의 빛, 향기, 그리고 그 느린 걸음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게 될 것 같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리워질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