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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동부, 베네치아에서 기차로 불과 30분 거리. 트레비소(Treviso)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도시였다. 나 역시 처음엔 단지 ‘베네치아로 가기 전 하루 묵을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이 조용한 도시가 주는 따뜻함과 여유에 마음을 빼앗겼다. 트레비소는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된 와인처럼 깊고 잔잔하게 스며든다.
기차역을 나서자 바로 느껴진 건 ‘공기의 색’이었다. 베네치아의 짙은 바다향과는 달리, 트레비소의 공기는 부드럽고 투명했다. 거리에선 막 구운 빵 냄새가 퍼지고,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카페 앞에서는 노부부가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의 미소는 오래된 벽돌보다 더 따뜻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곳은 살아 있는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하 위를 걷는 느릿한 산책
트레비소는 베네치아처럼 운하가 도시를 가로지른다. 하지만 여긴 관광객의 소음이 아닌, 물이 부드럽게 흐르는 소리가 주인공이다. 다리 위를 걷다 보면 잔잔한 수면 위로 하늘이 비치고, 그 아래를 오가는 오리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시렌가(Sile) 강 주변은 특히 아름다웠다. 나는 강가를 따라 걷다가 ‘폰테 단테(Ponte Dante)’라는 작은 다리에 멈춰 섰다. 단테의 이름을 딴 이 다리 위에는 그가 이 도시를 언급한 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바람이 그 구절을 따라 흘러가는 듯했고, 나는 잠시 그 시대의 단테를 떠올렸다.
걷다 보면 트레비소의 운하는 마치 도시의 혈관처럼 느껴진다.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는 작은 상점, 카페, 화랑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화랑 안에서는 지역 예술가가 수채화로 운하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붓끝에서 피어난 색감이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나는 말을 걸어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트레비소의 매력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이 도시는 정말 ‘조용함’으로 아름다웠다.
골목과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
점심 무렵, 나는 구시가지의 ‘피아차 데이 시니오리(Piazza dei Signori)’로 향했다. 트레비소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광장은 현지인들의 일상으로 가득했다. 시장에서는 신선한 채소와 치즈, 올리브 오일이 진열되어 있었고, 상인들은 활기차게 손님을 맞이했다. “Assaggia! (맛봐요!)”라는 말에 이끌려 파르마산 치즈를 한 조각 맛봤다. 입안에 퍼지는 짭조름한 맛이 도시의 공기와 어우러졌다. 이 단순한 경험이 이상할 정도로 행복했다.
광장 한쪽에서는 학생들이 자전거를 세워두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오래된 석조 건물 벽에 부딪혀 반사되며 도시를 한층 더 생기 있게 만들었다. 나는 그 옆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천천히 앉았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 바람에 흩날리는 포스터, 그리고 사람들의 발소리. 모두가 하나의 음악처럼 어우러졌다. 트레비소는 그렇게 내 일상의 속도를 천천히 늦춰주었다.
저녁의 트레비소, 예술과 빛이 만나다
해질녘이 되자 도시의 풍경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였다. 석양이 운하 위로 내려앉으며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물결이 금빛으로 반짝였고, 다리 난간을 따라 걷는 연인들의 실루엣이 그림처럼 이어졌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카메라를 꺼냈다가, 곧 다시 넣었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순간은 그냥 눈으로, 마음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저녁 식사는 작은 트라토리아에서 했다. 메뉴는 단순했다 — 리조토와 지역 와인 한 잔. 주인 아저씨는 “이건 우리 가족이 직접 만든 와인이에요.”라며 잔을 채워줬다. 향긋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퍼지자, 나는 그동안의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젊은 커플이 내게 말을 걸었다. “트레비소, 좋죠? 베네치아보다 더 진짜 같아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관광지가 아닌 ‘누군가의 삶이 있는 도시’라는 느낌이 강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트레비소의 밤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가로등 불빛이 운하 위에 일렁이고, 가끔 자전거 바퀴가 돌길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공기 속에는 저녁의 온기와 물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잠시 멈췄다. 여행이란 결국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닐까?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한 그 느낌. 트레비소는 그런 도시였다.
다음날 아침,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도시 전체가 여전히 잠에서 덜 깬 듯 조용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사서 손에 들고, 마지막으로 운하 쪽을 돌아봤다. 햇살이 물 위에서 반짝였고,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트레비소, 너는 나에게 고요의 도시로 남을 거야.”
트레비소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상의 아름다움이, 사람의 온기가,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평화가 있었다. 베네치아의 화려함에 지쳤다면, 이곳의 침묵 속에서 진짜 이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