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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스터(Münster)는 여행 책자에서는 자주 보이지 않는 도시지만, 직접 가보면 그 이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공기부터 달랐다. 차분하고 조용했다. 도시의 중심에는 오래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지나간다. 그 모습이 마치 세상이 잠시 쉬고 있는 듯했다. 뮌스터는 화려하지 않지만,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도시다.

프린치팔마르크트 거리에서 시작된 하루
뮌스터의 중심은 단연 프린치팔마르크트(Prinzipalmarkt) 거리다.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중세 시대 상인들의 회랑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아치형 기둥 아래를 걸을 때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하늘로 향한다. 그 건축물들은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됐다가 다시 복원된 것들이라고 했다. 돌의 질감이 그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건물 벽면에 비치자, 회색빛 도시가 은은하게 금빛으로 물들었다.
길가의 빵집에서 따뜻한 브뢰첸(Brötchen)을 하나 사서 손에 들었다. 갓 구운 빵 냄새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녹인다. 거리 한켠에는 꽃을 파는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매일 같은 자리에 서서 장미와 튤립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말을 걸자 부드럽게 웃으며 “오늘 날씨가 참 좋죠”라고 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서 도시의 온기가 전해졌다. 뮌스터는 그런 곳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하루가 차분히 흘러가는 곳.
거리 끝에는 성 램버트 성당(St. Lamberti Church)이 있다.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정오가 되면 종소리가 광장 전체에 퍼진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정리된다. 여행지에서 들리는 소리 중에는 ‘기억의 소리’가 있다. 뮌스터의 종소리가 바로 그랬다. 몇 년이 지나도 그 울림이 귓가에 남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운하 따라 걷는 오후, 뮌스터의 리듬을 느끼다
도시 중심에서 조금만 걸으면 운하가 나온다. 뮌스터는 ‘자전거 도시’로 유명하지만, 사실 나는 걷는 게 더 좋았다. 물 위로 반사되는 하늘빛과 자전거 바퀴의 소리,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강물의 리듬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리듬이 마음속의 복잡한 생각을 천천히 정리해줬다.
운하 옆에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학생들이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고 있었다. 뮌스터 대학교 근처라 그런지 젊은 공기가 가득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 한참을 그 풍경만 바라봤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고,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그런 시간 속에 있으니 나도 덩달아 천천히 숨을 쉬게 되었다. ‘이게 진짜 여행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지 않아도, 그 하루의 장면이 마음속에 그대로 각인됐다.
운하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그 위에서 본 풍경은 정말 그림 같았다. 갈매기 몇 마리가 물 위를 스치며 날고, 멀리서 교회의 첨탑이 보였다. 그 순간, 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여행 중 이런 찰나의 순간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살아 있다’는 감각이 온몸에 퍼진다. 뮌스터는 그런 순간을 많이 선물하는 도시였다.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마무리된 밤
해가 지자 도시는 더욱 고요해졌다. 프린치팔마르크트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돌바닥에 불빛이 부드럽게 번졌다. 카페에서 나오는 재즈 음악이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나는 테라스에 앉아 따뜻한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독일의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속의 고요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근처의 성당에서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낮보다 깊고 느리게 퍼지는 울림이었다.
그 종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가 조용한 건, 그만큼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기 때문 아닐까.’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식당의 직원, 카페의 바리스타, 자전거를 멈추고 길을 알려주던 대학생까지. 그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바쁘지 않은 미소, 불필요한 말이 없는 대화. 뮌스터의 매력은 바로 그런 ‘잔잔함’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비가 살짝 내리기 시작했다. 독일의 비는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돌길 위에서 반짝였다. 우산을 접고 그냥 그 길을 걸었다. 발밑에서 들리는 빗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 소리, 그리고 차가운 공기 속의 향기. 그 순간,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어떤 도시들은 여행을 끝내는 게 아쉬운데, 뮌스터가 바로 그랬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창밖에 새들이 울고 있었다. 커튼을 열자 비에 젖은 지붕이 반짝였다. 나는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잘 지내, 뮌스터.’ 여행의 진짜 의미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고요를 다시 만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뮌스터는 그걸 가르쳐준 도시였다. 화려하지 않아도,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 아마 그게 진짜 좋은 여행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