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처음 리오마조레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다 위로 기울어진 오렌지빛이었어요. 저녁 해가 천천히 내려앉으며 마을의 집들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바람은 염분 섞인 냄새를 실어 나르고 있었죠.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파도소리, 그리고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이탈리아어의 리듬. 그 순간,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담긴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으로 살아 숨 쉬는 마을
리오마조레는 친퀘테레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이에요. 언덕 위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서로 기대듯 경사진 골목을 따라 이어져 있죠. 처음 골목을 걸을 때, 마치 동화 속 미니어처 마을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건물 하나하나가 노랑, 분홍, 주황, 초록으로 칠해져 있고, 창문마다 빨래가 펄럭이며 사람들의 하루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알록달록한 색감 속에서도 조화가 느껴졌습니다. 어딘가 유치하거나 과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햇살이 비칠 때마다 색이 조금씩 변하며, 마을 전체가 숨 쉬는 듯한 인상을 주었죠. 리오마조레 사람들은 바다와 햇빛에 맞춰 사는 듯했습니다. 카페 앞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노인, 길가에서 수세미를 팔던 아주머니, 그리고 언덕길을 뛰어오르는 아이들. 모두 느긋하고 여유로운 속도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저도 어느새 그 리듬에 동화되어,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찍던 손을 내리고, 그냥 눈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마을의 진짜 매력은 ‘풍경’이 아니라 ‘온도’였으니까요. 해질 무렵, 골목에 스며드는 주황빛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이는 그 공기의 온도 말이에요.
오렌지빛 바다에서의 시간
리오마조레의 바다는 단순히 파랗다고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해가 질 때면 바다는 마치 와인빛처럼 짙어지고, 파도는 그 빛을 머금은 채 부서집니다. 저는 어느 저녁, 바다 앞 방파제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들고 하염없이 그 빛을 바라봤습니다. 멀리서 기타를 치는 여행자의 노래가 들렸고, 옆에 앉은 커플은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조용히 웃고 있었죠. 그 장면이 너무 평화로워서,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그때 문득 ‘삶이란 이런 순간을 모으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창한 성취보다, 이름 모를 마을의 바닷가에서 잠시 느낀 평화. 그게 인생의 진짜 보상처럼 느껴졌습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파도소리가 발끝에 머물며 인사하듯 따라왔습니다. 리오마조레의 밤은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따뜻했어요.
사람의 온기가 남은 골목
다음 날 아침, 아직 관광객이 많지 않은 시간에 다시 골목을 걸었습니다. 창문이 하나둘 열리고, 빵 굽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죠. 숙소 주인 할머니가 문 앞에 나와 “Buongiorno!”라고 인사해주셨고, 저는 서툰 이탈리아어로 “Buongiorno, bella mattina!”라고 답했습니다. 그 짧은 대화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리오마조레의 사람들은 낯선 여행자에게도 미소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게 이 마을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마을을 떠나기 전, 저는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와 레몬 케이크를 주문했습니다. 카페 주인이 “오늘은 파도가 높으니, 기차보다 늦게 가는 게 좋아요.”라고 조언해주더군요. 그 한마디에 이곳 사람들이 바다와 얼마나 가까이 살아가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반짝였고, 햇빛은 다시 마을의 벽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의 감동이 다시 밀려왔죠. 저는 마지막으로 골목을 돌아보며, ‘이 따뜻한 빛을 잊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리오마조레는 단지 여행지가 아니라, 내 마음의 어느 한 부분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리오마조레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했어요. 여행이란 결국 ‘머물렀던 마음의 흔적’을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 리오마조레는 언제나 오렌지빛으로 남을 겁니다. 따뜻하고, 느리고, 사람 냄새가 나는 그 색으로요.
무료 이미지 참고: https://pixabay.com/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