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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남서쪽 해안에 자리한 도시, 투르쿠(Turku). 지금은 헬싱키가 수도지만, 한때 핀란드의 중심이자 문화와 역사의 무대였던 곳입니다. 저는 이 도시를 ‘핀란드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흐르는 곳’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헬싱키의 현대적인 모습과는 다른 고즈넉함이 있고, 동시에 젊고 활기찬 기운도 느낄 수 있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투르쿠를 여행하며 저는 핀란드 사람들의 뿌리와 일상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투르쿠 성, 중세의 숨결을 느끼다
투르쿠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단연 투르쿠 성(Turun linna)이었습니다. 13세기에 세워져 수많은 전쟁과 권력 다툼을 지켜본 성은, 지금은 박물관이자 역사적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성문을 들어서며 마치 중세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성 내부는 차갑고 어두웠지만, 그 안에서 만나는 전시물들은 당시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기사들이 사용하던 무기와 갑옷, 귀족들이 입었던 의상, 그리고 어두운 감옥까지. 돌벽에 손을 대니 세월의 차가움이 그대로 전해져 손끝이 서늘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오라강(Aurajoki)의 풍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양쪽으로 늘어선 도시의 건물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투르쿠는 강과 함께 살아온 도시구나’라는 생각이 그 순간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오라강을 따라 걷는 산책
투르쿠의 진짜 매력은 오라강 주변에서 드러납니다. 저는 아침마다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카페와 레스토랑, 작은 상점들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고, 여름이면 야외 테라스에 사람들이 앉아 맥주와 커피를 즐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날 저녁, 저는 강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해가 천천히 지며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강 위에는 작은 요트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는 현지인 밴드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고, 그 음악에 맞춰 아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이게 바로 핀란드 사람들의 여유로움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강가에는 정박된 오래된 배가 식당이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 한 배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는데, 창밖으로 강물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식사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단순한 한 끼였지만, 공간이 주는 감각이 제겐 큰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투르쿠 대성당과 도시의 일상
투르쿠의 상징 중 또 하나는 투르쿠 대성당(Turun tuomiokirkko)입니다. 핀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루터교 성당으로, 그 위엄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듯했습니다. 저는 일요일 아침 미사 시간에 맞춰 방문했는데, 성당 내부는 엄숙하면서도 따뜻했습니다. 신자들의 합창이 성당 천장을 울리며 퍼져 나갈 때, 저는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당에서 나와 다시 오라강 쪽으로 걸어가니, 투르쿠의 일상이 펼쳐졌습니다. 마켓 스퀘어에서는 현지 농부들이 직접 가져온 딸기와 빵, 치즈를 팔고 있었습니다. 저는 작은 바구니에 담긴 신선한 딸기를 사서 바로 맛봤는데, 그 달콤함이 여행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주었습니다. 옆자리에서는 어르신들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아이들은 풍선을 들고 뛰어다녔습니다. 그 평범한 장면들이 제겐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투르쿠가 남긴 여운
투르쿠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히 여행 이상의 경험이었습니다. 중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과 성당, 오라강을 따라 흐르는 여유로운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웃음까지. 이 모든 것이 모여 투르쿠라는 도시의 깊이를 보여주었습니다. 헬싱키가 현대적인 수도라면, 투르쿠는 ‘핀란드의 뿌리’를 보여주는 도시입니다. 겉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기억과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는 투르쿠를 떠나는 날, 기차 창밖으로 멀어지는 오라강을 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이 강변을 천천히 걸어야지.’ 그만큼 투르쿠는 제게 조용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핀란드 여행을 간다면, 저는 꼭 헬싱키만 보지 말고 투르쿠에도 들러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곳에서야말로 핀란드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