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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혼슈의 맨 끝자락, 바다와 맞닿은 도시 시모노세키. 사실 처음 이곳을 여행하기 전까지는 큰 기대가 없었습니다. 후쿠오카와 가까워 단순히 들르는 정도의 도시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발을 내딛자마자 바닷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짙은 소금 향기와, 항구 도시 특유의 활기가 저를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시모노세키는 단순한 바닷가 도시가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간몬 해협, 바다가 만든 드라마
시모노세키에서 가장 먼저 만난 건 간몬 해협이었습니다. 혼슈와 규슈 사이를 잇는 좁은 바닷길인데, 양쪽을 오가는 배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며 그 활기를 더합니다. 해협 옆 산책로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거대한 유조선부터 작은 어선까지 끊임없이 바다를 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간몬 해협을 바라보며 잠시 역사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곳은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쟁터였습니다. 특히 ‘겐페이 전투’로 유명한 단노우라 전투가 바로 이 바다에서 벌어졌죠. 파란 물결을 보면서 천 년 전 치열했던 전쟁을 상상하니, 그저 평화롭게만 보이던 바다가 조금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평화로운 바다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가라토 시장, 복어와의 첫 만남
시모노세키 하면 복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복어 산지이자, 복어 요리의 본고장입니다. 저는 가라토 시장(唐戸市場)을 찾았는데, 들어서자마자 활기가 넘쳤습니다. 신선한 생선들이 가득 놓인 가판대, 상인들의 외침, 그리고 그 속에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시장은 여행자와 현지인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드디어 복어 회 한 접시를 받아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은 긴장됐습니다. ‘독이 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젓가락을 들면서도 마음이 조심스러웠죠. 하지만 입안에 넣는 순간, 생각보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퍼졌습니다. 기름지지 않고 깔끔한 그 맛은 다른 생선들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시장 안 작은 가게에서 따끈한 복어 미소국까지 곁들이니 몸이 금세 따뜻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마 그 순간, 저는 복어에 완전히 매료된 듯합니다.
아카마 신궁, 붉은 기둥이 전하는 이야기
시모노세키의 또 다른 얼굴은 아카마 신궁입니다. 바다를 향해 붉게 솟아 있는 신궁은 멀리서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곳은 단노우라 전투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안토쿠 천황을 모신 곳입니다. 경내에 들어서니 새빨간 도리이와 신전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여행지에서 사찰이나 신사는 종종 형식적으로만 들를 때가 많지만, 아카마 신궁은 달랐습니다. 역사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소였고, 바다와 신궁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은 묘한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전했습니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이 도시는 단순히 현재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과거와 오늘이 함께 숨 쉬는 곳이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시모노세키가 남긴 울림
시모노세키에서 보낸 하루는 짧았지만 강렬했습니다. 바다가 주는 자유와 활기, 역사 속 이야기,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복어의 맛까지. 이 모든 것이 모여 시모노세키라는 도시를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간몬 해협을 다시 바라봤습니다. 그 위로 석양이 물들며 바다는 붉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침의 활기찬 바다와는 또 다른, 고요하면서도 따뜻한 풍경이었습니다. 여행이란 결국 그곳의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시모노세키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이번엔 더 천천히, 더 오래 머물며 그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