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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북서부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아폴로니아(Apollonia)는 여행책 속에서도 조용히 숨 쉬는 도시였다. 아테네에서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건, 바람의 냄새였다. 바다와 흙, 그리고 오래된 돌의 향이 섞인 그 냄새는 이 도시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의 한 조각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고요함 속의 고대 유적
아폴로니아의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은 그리 크지 않았다. 표지판 하나와 잡초가 무성한 흙길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너진 신전의 기둥,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그리고 아무 소리 없는 하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끝에 닿는 자갈의 소리만이 공기 속에 퍼졌다. 눈앞에 펼쳐진 신전의 잔해는 마치 바다 위의 파도처럼, 흐르지 않으면서도 생동감이 있었다.
기둥에 손을 얹어보니 표면은 거칠고 따뜻했다. 햇살이 수천 년 동안 이 돌을 비추며 만들어낸 감촉이었다. 눈을 감으니 그리스의 신들이 이 땅 위를 걸었을 것 같은 상상이 스쳤다. 그리스의 고대 도시들은 대부분 화려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아폴로니아는 달랐다. 여긴 여전히 조용했고, 그 고요함이 오히려 시간의 무게를 더했다. 나는 잠시 앉아 주변을 바라봤다. 새 한 마리가 기둥 위를 스치듯 날아올랐고,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그 순간, 마치 내가 고대 그리스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흔적이 남은 곳
도시 유적 근처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돌로 지은 집들이 언덕을 따라 이어져 있었고, 골목길마다 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한 카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주인은 나를 보고 “이곳까지 오는 사람은 드물어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 한마디에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니,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노인은 집 앞에서 포도잎을 손질하고 있었다. 역사의 무게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동안, 나는 이 마을의 시간을 느꼈다. 이곳은 빠르지 않았다. 하루의 리듬이 마치 오래된 시계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카페 주인은 내게 작은 접시에 올리브 몇 알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폴로니아는 오래전엔 신들의 도시였죠.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도시예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곳의 돌과 흙,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모두 하나의 역사처럼 이어져 있었다.
시간이 멈춘 풍경을 걷다
해질 무렵, 나는 다시 유적지로 돌아갔다. 낮의 뜨거운 햇살이 누그러지고, 하늘은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신전의 기둥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풀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순간, 마치 시간 전체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내 발소리. 모든 것이 단순하고 순수했다. 나는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이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며 신전의 돌기둥을 붉게 물들였다. 그 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 장면을 두 눈에 담아두느라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걷기만 해도 충분했다. 과거의 시간이 바람처럼 내 옆을 스치고, 그 속에서 내 하루도 조금은 느리게 흘러갔다. 세상의 시계가 잠시 멈춘 듯한 그 고요함이 내 마음을 가만히 덮었다. 나는 주머니 속의 작은 수첩을 꺼내 몇 줄을 적었다. ‘아폴로니아, 시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글자를 적는 동안에도 바람은 계속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내 글씨를 스쳐가며 마치 대답하듯 속삭였다. “그래, 여기는 아직도 살아 있어.”
돌과 바람이 전한 이야기
밤이 찾아오자 하늘엔 별이 떠올랐다. 도시의 불빛이 거의 없는 덕에, 별들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나는 유적지 근처 언덕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스의 여름밤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그 속에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결국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세상의 소음을 잠시 잊는 그 시간 말이다.
아폴로니아는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그 단단함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오래된 돌기둥 하나, 무너진 벽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조금 천천히 걸어야 했다. 그렇게 걸으며 나는 이 도시가 전하려던 말을 조금은 이해한 것 같았다.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른 형태로 남아 있을 뿐.’
다음 날 아침,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신전 앞에 섰다. 햇살이 돌 위에 떨어지며 따뜻한 빛을 냈다. 나는 손바닥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고마워요, 아폴로니아.” 여행의 마지막 순간에도 이곳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충만했다. 마치 오래된 시간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 버스 창문에 비친 풍경은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그 돌의 온기와 바람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폴로니아는 나에게 ‘멈춘 시간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도시였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 고요한 언덕 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