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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중심부, 움브리아 지방의 도시 테르니(Terni)는 이름조차 낯선 곳이었다. 로마나 피렌체처럼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낯섦이 마음을 끌었다. 나는 이 도시가 가진 ‘조용한 리듬’을 느끼고 싶었다. 피렌체의 번화한 거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산을 지나고, 작은 시골 마을들을 스쳐 지나갈 때쯤, 창밖으로 초록빛 평야와 오래된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테르니가 단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골목, 테르니의 첫인상
기차역을 나서자 공기는 달랐다. 이곳의 공기에는 도시의 소음 대신 오래된 돌길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창문에는 세탁한 옷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단순한 풍경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테르니의 거리는 화려하지 않았다. 대신 진짜 ‘생활의 흔적’이 느껴졌다. 구두 수선공이 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장바구니를 덮어놓은 채 천천히 걸었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의 발자국이 더 많은 도시. 그 평범함이 주는 안도감이 있었다. 한참을 걷다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벽에는 낡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 햇살이 유리컵에 부서졌다. 카푸치노를 주문하자 주인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테르니에는 뭐 보러 왔나?” “그냥, 조용해서요.” 그는 잠시 웃더니 “그럼 제대로 온 거야. 여긴 시간이 멈춘 곳이니까.”라고 답했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하루를 지내고 나니 정말 그 말이 사실이었다.
나르니와의 사이, 자연이 만든 휴식
테르니에서 조금만 나가면 나르니(Narni)라는 고대 도시가 있다. 길을 따라 걸으면 녹음이 짙은 언덕이 이어지고, 멀리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폭포 소리가 들린다. 바로 마르모레 폭포(Cascata delle Marmore)였다. 인공 폭포지만, 자연의 일부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물보라가 햇빛에 반사되며 무지개를 만들어냈고, 그 아래에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런 순간이 바로 여행의 이유 아닐까.’ 폭포 근처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바람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스쳤고,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울렸다. 그 단조로운 일상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여행 중인데도, 마치 오래된 일상 속으로 스며든 듯한 기분이었다. 테르니의 자연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 단정함과 소박함 속에 묘한 위로가 있다.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느끼는 고요함, 그게 이 도시의 진짜 매력이다.
조용한 밤, 삶의 리듬이 들리다
저녁 무렵,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때쯤 테르니의 거리는 다시 변한다. 낮에는 소박했던 골목이, 밤에는 황금빛으로 물든다. 작은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와인을 든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창문 너머로 들리는 식탁의 대화들. 그 모든 게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나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 리조토와 현지 와인을 주문했다. 주인은 “우리 가족이 직접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야”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 모금 마시자 부드러운 향과 함께 이 도시의 따뜻함이 전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를 걸었다. 공기에는 빵 굽는 냄새가 섞여 있었고, 돌길에 발소리가 작게 울렸다. 도시의 밤은 조용했지만, 그 안엔 생명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여행의 본질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꺼내는 일이라는 걸. 테르니에서 나는 그 단순한 진리를 배웠다.
여행을 마치고 떠나는 날, 역으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사람들이 평범한 하루를 살고 있었고, 거리의 바람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와도 여긴 변하지 않겠지.” 그 생각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테르니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조용한 리듬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다. 사람들의 느린 걸음, 낡은 돌길,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 그 모든 게 하나의 음악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멜로디를 기억한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삶의 소리’로 남아 있는 도시 — 그것이 바로 테르니였다.
[무료 이미지 참고: https://pixabay.com/k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