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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브레멘은 내가 처음 ‘조용한 유럽’을 느꼈던 도시였다. 베를린이나 뮌헨처럼 화려하지도, 함부르크처럼 바쁘지도 않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 공기부터 달랐다. 새벽의 차가운 안개 사이로 종소리가 퍼지고,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오랜 세월의 숨결이 느껴졌다. 브레멘은 사람보다는 ‘시간’이 사는 곳 같았다. 도시 전체가 잠시 멈춰 있는 듯한, 묘한 평화가 있었다.
슈노어 지구, 동화 속 골목을 걷다
슈노어(Schnoor) 지구를 처음 걸었을 때, 마치 오래된 그림책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손바닥만 한 골목 사이에 붙어 있는 아기자기한 집들, 각기 다른 색의 창문틀, 그리고 벽에 걸린 손수 만든 표지판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이른 아침엔, 오히려 주민들의 일상이 그대로 보였다. 작은 빵집 앞에서 노부부가 이야기를 나누고, 창문 너머로 고양이가 천천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순간, ‘이게 진짜 여행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 없이 걷고, 계획 없이 멈추는 시간. 그게 브레멘의 매력이었다.
슈노어 거리의 집들은 대부분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당시 어부와 장인들이 살던 곳이 지금은 카페와 공방, 작은 갤러리로 바뀌어 있다. 벽마다 오래된 간판이 걸려 있고, 창문에는 말린 꽃다발이 매달려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찻집에 들어갔다. 안에는 낡은 나무 의자와 틀어진 시계, 그리고 창가에 놓인 초 한 개가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따뜻한 민트차를 내주며 “이 집은 전쟁 때도 무너지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전쟁과 세월을 견디며 남은 공간의 향기, 그게 바로 브레멘이었다.
음악대 동상 앞에서,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다
어릴 적 ‘브레멘 음악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에게도 그 동화는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브레멘 시청사 옆 광장에서 동상과 마주했을 때,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당나귀, 개, 고양이, 수탉이 차례로 올라서 있는 그 익숙한 모습. 동상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당나귀 다리를 만지고 있었다. 소원을 빌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나도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의외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주변에는 거리 음악가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바이올린 소리와 아코디언 음이 공기 중에 퍼지며, 마치 동화 속으로 다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늘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서 찾아온다. 그날 브레멘의 하늘은 약간 흐렸지만, 그 회색빛조차 도시와 너무 잘 어울렸다. 나는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사람들은 바삐 걷지 않았다. 그게 이 도시의 리듬이었다.
시청사 건물은 고딕 양식의 걸작이다. 밤이 되면 조명이 켜지고, 붉은 벽돌과 조각들이 그림자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그 앞에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잊을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의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그 순간을 기록하는 잉크 같은 역할을 한다. 한 모금 삼킬 때마다 ‘이 도시를 기억하자’는 마음이 깊어진다.
베저 강변에서, 평화의 의미를 다시 느끼다
브레멘을 제대로 느끼려면 베저(Weser) 강변을 꼭 걸어야 한다.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계절마다 색이 바뀐다. 봄에는 벚꽃, 여름엔 짙은 녹음, 가을엔 황금빛 단풍이 흐르고, 겨울엔 하얀 눈이 고요히 덮인다. 나는 오후쯤 천천히 강변을 걸었다. 강 위로 떠 있는 배들과 그 사이를 스치는 갈매기,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바퀴 소리. 그 모든 것이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길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건너편에는 강을 건너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평화란 건 거창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여행이란 결국 이런 사소한 순간을 느끼기 위한 여정 아닐까.
브레멘은 관광지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요란한 간판도 없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낮다. 도시 전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화려함보다 진심, 속도보다 여유. 내가 이곳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밤이 되면 강 위의 불빛이 잔잔히 반사되고,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온다. 나는 그날의 공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건 단순한 여행의 추억이 아니라, ‘마음이 쉬던 시간’이었다.
언젠가 다시 유럽을 간다면, 나는 또 브레멘을 찾을 것이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 도시의 고요한 숨소리, 따뜻한 찻집의 향기, 그리고 음악대 동상 앞의 미소가 그립기 때문이다. 여행은 결국 마음이 머무른 곳을 다시 찾는 일이다. 그리고 내 마음은, 여전히 브레멘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