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의 한가운데, 관광객의 발길이 상대적으로 덜한 도시 브레시아. 밀라노나 베로나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행 중 어느 날, 소란스러운 대도시의 리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날이었다. 무작정 기차표를 끊어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브레시아였다.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느껴진 첫인상은 '고요함'이었다. 북적거리는 상점도, 셀카를 찍는 무리도 없었다. 그 대신 오래된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오는 햇살, 좁은 돌길 위를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여유, 그리고 묵직한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흔적이 있었다.

브레시아

브레시아 대성당 앞에서 느낀 고요한 무게

브레시아의 중심인 두 개의 성당, ‘두오모 베키오(Duomo Vecchio)’와 ‘두오모 누오보(Duomo Nuovo)’는 마치 서로 다른 시대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풍경을 만들었다. 둥근 로마네스크 양식의 베키오 성당은 돌벽 하나하나에 세월이 스며 있었고, 옆의 새 성당은 그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했다. 나는 그 사이에 앉아 있었다. 관광객 몇 명이 지나가고, 광장 한쪽에서는 노부부가 손을 잡고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아, 이런 도시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관광지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이런 곳이 진짜 여행 같았다.

광장을 따라 걷다 보면 로마 시대 유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벽돌 아래로 드러난 기둥 하나, 돌판에 새겨진 문양 하나에도 천 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그곳에서 현지 가이드가 지나가며 말하던 한 문장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브레시아는 새로운 걸 쌓지 않고, 옛것 위에 새로운 삶을 얹는 도시예요." 정말 그랬다. 도시 전체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낡았지만 살아 있는 느낌, 그게 브레시아의 숨결이었다.

골목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점심

브레시아의 골목은 미로 같다. 돌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작은 광장이 나타나고, 그 한쪽에는 현지인들이 앉아 있는 작은 오스테리아가 있다. 나는 그날 오후, 'Osteria al Bianchi'라는 현지식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였지만, 안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나는 메뉴판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주인아저씨의 추천으로 ‘카소넬리(Casoncelli)’를 주문했다. 고기와 빵가루, 버터가 어우러진 롬바르디아식 파스타였다.

첫 입을 먹는 순간, 따뜻함이 입안에 퍼졌다.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맛이었다. 옆자리의 할머니가 웃으며 “맛있지?”라고 물었고, 나는 “Molto buono!”라며 웃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웃음은 통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도시가 낯선 곳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마을처럼 느껴졌다. 여행에서 이런 순간을 만나면, 그 도시와 묘한 인연이 생긴다.

산 피에트로 성 위에서 본 브레시아의 풍경

식사 후에는 브레시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 피에트로 성(Castello di Brescia)’로 향했다. 언덕을 따라 천천히 오르며, 계단 아래로 펼쳐지는 도시를 바라봤다. 돌담 사이사이에 핀 라벤더 향이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브레시아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붉은 지붕들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대성당의 둥근 돔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 멀리에는 알프스의 흰 능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장면이 참 잊히질 않는다. 바람이 불고, 햇살이 따뜻했지만, 마음 한켠은 묘하게 차분했다. 마치 그 도시가 “괜찮아, 천천히 살아도 돼”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성벽에 앉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생각했다. '여행이란 결국 나 자신을 느리게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브레시아에서의 하루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나를 조용히 위로해주었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잊고 있던 여유, 그리고 내 안의 평화를 다시 꺼내준 도시였다.

브레시아의 밤, 그리고 남겨진 기억

해가 지고 나서 광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노을이 대리석 건물 위에 붉게 번지고,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젊은이들은 카페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웃고, 아이들은 분수대 주위를 돌았다.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여행 중에는 늘 사진을 많이 찍지만, 이 순간만큼은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마음으로 담고 싶었다. 눈앞의 장면이 아니라, 그 분위기 자체를 기억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어스름이 내려앉는 브레시아의 불빛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오늘 하루, 참 좋았다.” 아무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브레시아는 내 기억 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았다. 그곳의 공기, 골목의 냄새, 따뜻했던 사람들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언젠가 다시 이탈리아를 간다면, 나는 또다시 이 도시를 찾아갈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 내 마음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여행은 화려한 곳보다, 마음이 쉬어가는 곳을 만나는 일이다. 브레시아는 그런 도시였다. 조용하지만 따뜻하고, 낯설지만 익숙했다. 시간을 천천히, 그리고 진심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 도시. 내게 브레시아는 그렇게, 하나의 기억이자 쉼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