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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북부의 한가운데, 에브로 강을 따라 자리 잡은 사라고사는 여행자에게 독특한 감정을 안겨주는 도시다.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공기는 분명 마드리드의 바쁜 기운도, 바르셀로나의 화려함도 없었다. 대신 오래된 성벽의 그림자와 강가를 스치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느린 리듬이 있었다. 그 리듬 속에서 나는 내 걸음을 자연스레 늦췄다. 그날 오후의 햇살은 금빛이었고, 도시의 표면에는 세월의 결이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사라고사
사라고사

에브로 강과 바실리카, 도시의 심장

사라고사의 중심은 단연 에브로 강이다. 이 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다리 중에서도, ‘푸엔테 데 피에드라’에서 바라본 풍경은 잊기 힘들다. 강 건너로는 거대한 ‘바실리카 델 필라르(Basilica del Pilar)’가 우뚝 서 있다. 그 돔 지붕 위의 타일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곡선은 마치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천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는 오후의 느릿한 시간에 다리 위에 서서 강물 위로 비치는 그 건축물의 그림자를 오래 바라봤다. 강물은 조용히 흐르지만, 그 속에는 도시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사라고사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그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전쟁과 재건을 반복하면서도, 이 바실리카와 강은 도시를 지탱해온 중심축이었다.

골목 속의 일상과 카페의 온기

사라고사의 진짜 매력은 대성당이나 미술관보다도 오히려 골목에 숨어 있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가죽 냄새가 스며든 오래된 상점과, 벽돌이 삐걱거리는 건물 사이로 흘러나오는 기타 선율이 섞인다. 한참을 걷다 ‘카페 엘 투보(Café El Tubo)’라는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현지 사람들이 맥주와 타파스를 즐기며 느릿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서 마신 커피는 특별히 향이 진하지도, 디저트가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도시의 시간은 모두가 조금씩 나눠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신문을 읽고,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또 누군가는 강가로 산책을 나선다. 모두가 조금 느리게, 하지만 정확히 자기만의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역사의 흔적, 그리고 지금의 사라고사

사라고사는 로마 제국 시대부터 존재했던 도시다. 그래서 곳곳에서 고대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세사르아우구스타 포럼’ 유적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돌기둥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돌의 표면은 부서지고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인간의 손길이 살아 있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숨결이 돌에 스며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시 전체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낡은 흔적들이 새로운 삶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대학가 근처로 가면 젊은 예술가들이 그린 벽화가 곳곳을 채우고, 저녁이면 거리 공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낡은 도시의 틀 속에서, 사라고사는 여전히 ‘살아 있는 도시’로 숨 쉬고 있었다.

밤의 사라고사, 그리고 남겨진 감정

해가 지고 나면 사라고사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바실리카의 둥근 돔은 조명에 비쳐 황금빛으로 물들고, 강 위로는 별빛이 떨어진다. 나는 강가 벤치에 앉아 조용히 도시의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타 선율,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강물의 잔잔한 흐름. 그 순간, 이 도시는 그저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이 깃든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는 화려함보다 진심이, 속도보다 여유가 있었다. 사라고사는 나에게 ‘머무는 법’을 가르쳐준 도시였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예술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사람들의 느긋한 일상이 모두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리 위에서 한 번 더 강을 바라봤다. 빛이 물결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사라고사라는 도시는, 잊혀지지 않는 ‘시간의 향기’를 품은 곳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