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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발렌시아는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햇살의 질감이 다르다. 마드리드의 뻣뻣한 열기와도, 바르셀로나의 화려한 속도감과도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른다. 바람이 살짝 염분을 머금고 있었고, 거리의 벽들은 햇빛에 조금씩 색이 바래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램조차도 아름다웠다. 발렌시아는 ‘낡음’과 ‘빛남’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도시였다. 마치 오래된 그림 속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랄까.

발렌시아

햇살 아래의 골목, 그리고 바다로 향하는 길

숙소 근처 좁은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닥의 돌들은 세월의 무게를 견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길 위로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낯설지 않게 들렸다. 문득 골목 끝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엔 unmistakably,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씩, 도시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즈넉한 돌담이 사라지고, 대신 하얀색 건물과 야자수가 하나둘 나타났다. 어느새 내 눈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에메랄드빛 지중해는 놀랍도록 고요했지만, 동시에 살아 있었다. 파도는 낮게 일렁이며 해안가의 모래를 살짝 적셨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맥주를 들고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파에야의 도시, 그리고 한 끼의 기억

발렌시아에 왔다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음식이 있다. 바로 ‘파에야(Paella)’. 사실 나는 처음엔 단순한 해산물 볶음밥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변 근처 작은 식당에서 먹은 그 한 끼는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주문한 파에야가 철판에 담겨 나왔을 때, 그 냄새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감동이었다. 홍합, 새우, 오징어, 그리고 닭고기가 고루 섞여 있었고, 밥알은 사프란 향을 머금고 노랗게 빛났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는 순간, 바다의 풍미가 그대로 퍼졌다. 그 맛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이 도시의 리듬, 햇살, 바람이 모두 응축된 감정 같았다. 식당 주인은 내가 천천히 음미하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건 단순한 밥이 아니에요. 발렌시아 사람들의 일요일이에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발렌시아의 사람들은 음식을 단순한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언어처럼 다루고 있었다.

예술이 일상이 되는 도시, 시티 오브 아츠 앤드 사이언스

다음날, 나는 ‘시티 오브 아츠 앤드 사이언스(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로 향했다. 이름부터 거창했지만, 실제로 그곳은 이름 이상의 공간이었다. 하얀 구조물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곡선으로 이어진 외관은 마치 미래 도시의 일부처럼 보였다. 특히 ‘헤미스페리코(Hemisfèric)’ 건물은 마치 거대한 눈동자 같았다. 하늘과 물, 그리고 건축물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며 빛을 반사할 때,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 도시가 단지 ‘역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발렌시아는 과거의 유산 위에 새로운 예술을 더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돌길 위에 현대 건축이 세워지고, 그 옆에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웃고 있었다. 세대와 시간이 뒤섞여도 전혀 충돌하지 않는 도시. 그게 바로 발렌시아였다.

노을이 물든 도시, 그리고 남겨진 여운

저녁이 되자 해변가의 색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눈부시게 푸르던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파도는 더 느리게 밀려왔다. 해안가 벤치에 앉아 맥주 한 병을 들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타 소리, 어린아이가 웃는 소리, 그리고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가 섞였다. 나는 그 순간, ‘여행’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여행이란 새로운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얼마나 느리고 솔직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발렌시아는 그런 도시였다. 사람을 서두르게 하지 않고, 대신 한 걸음 멈춰 서게 만든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진짜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해가 완전히 지자 하늘은 보랏빛으로 변했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 도시의 하루가 끝났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파에야의 향기와 바다의 바람이 남아 있었다.

발렌시아는 내가 만난 도시 중 가장 ‘따뜻한 리듬’을 가진 곳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바다를 보며 자라고, 예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음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눈다. 그 모든 게 자연스럽고, 그래서 아름답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자 나는 그 향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나는 언젠가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올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에는 ‘삶이 좋은 온도’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