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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라(Pula). 크로아티아의 다른 유명 도시들, 예컨대 두브로브니크나 스플리트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 점이 더 끌렸습니다. 아드리아해의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고대 로마의 흔적이 일상 속에 스며 있는 곳. 풀라는 소박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도시였습니다. 처음 도착했을 때,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에 펼쳐진 바다와 돌담, 그리고 낮은 건물들이 제게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풀라 아레나 앞에서 멈춘 시간
풀라의 상징은 단연 아레나(Arena)라 불리는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입니다. 기원전 1세기경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도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저는 저녁 무렵 아레나 앞에 도착했는데, 석양이 경기장의 돌벽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하늘로 뻗어 있고, 그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모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관광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었고, 현지인 아이들은 경기장 옆 공터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수천 년 전 이곳에서 펼쳐졌을 검투사의 싸움과 지금의 평화로운 풍경이 겹쳐지는 것 같다고. 시간이 겹겹이 쌓여도 도시가 품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올드타운 골목에서 만난 삶의 향기
아레나에서 조금만 걸으면 풀라의 올드타운이 이어집니다. 좁은 골목마다 세월이 묻어 있고, 곳곳에 아치와 석조 건물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 신전(Temple of Augustus)을 마주했을 때, 저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단순하지만 웅장한 기둥들이 서 있었고, 그 앞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고대 유적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풍경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골목 사이 작은 카페에 앉아 현지 와인을 한 잔 시켰습니다. 앞 테이블에서는 노부부가 바다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옆자리 젊은이는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풀라의 삶은 조용했지만, 그 속에 깊은 안정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자인 제가 그 풍경 속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드리아해의 바람과 바닷가의 여유
풀라를 여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닷가 산책입니다. 저는 현지인들이 추천한 베로나 비치(Verudela Beach)를 찾았는데, 맑고 투명한 물빛이 눈부셨습니다. 발을 담그니 차갑지만 금세 익숙해졌고, 수평선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해변에서 책을 읽는 사람, 아이스크림을 들고 웃는 아이, 그리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헤엄치는 사람들. 그 모든 모습이 지중해의 여유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해질 무렵, 바다 위에 붉은 빛이 드리우고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는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풍경이었습니다. 저는 바위 위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풀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담백함이 마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풀라가 남긴 감정
풀라에서 보낸 시간은 조용했지만, 아주 진했습니다. 아레나에서 느낀 웅장한 역사, 올드타운 골목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바닷가에서 누린 여유. 이 모든 것이 모여 풀라라는 도시를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아레나를 바라봤습니다. 낮에는 웅장하고 위엄 있었던 건물이, 밤에는 부드럽게 조명이 켜져 마치 도시를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보였습니다. 풀라는 크지 않은 도시지만, 그 속에 담긴 시간의 깊이와 사람들의 삶의 온기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게 풀라는 ‘고대와 현재, 역사와 일상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로 남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아드리아해를 찾는다면, 저는 반드시 이 도시로 돌아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