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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이라 하면 대부분 리우데자네이루의 해변이나 상파울루의 번잡한 거리부터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내가 향한 곳은 조금 달랐다. 브라질 남부, 해발 900미터 고지에 자리한 도시 ‘쿠리티바(Curitiba)’. 사람들은 이곳을 “브라질의 숨은 보석”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도시 전체가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위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도시가 어떻게 그렇게 조용한 품격을 지니게 되었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쿠리티바

첫인상, 회색빛 도시 속의 초록

공항을 나서자마자 공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브라질의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선선하고, 바람은 깨끗했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버스 창밖으로 공원과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놀라운 건, 그게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일부처럼 보였다는 거다. 아스팔트와 잔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사람들이 점심시간마다 그 잔디 위에 앉아 도시락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떤 도시는 사람이 공간에 맞추어 살아가지만, 쿠리티바는 공간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져 있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오페라 데 아루메(Ópera de Arame)’, 철과 유리로 만들어진 독특한 공연장이었다. 숲 속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그 건물은 마치 동화 속 풍경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이 투명한 유리 위를 따라 흘렀다. 공연이 없는 낮이었지만,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음악처럼 느껴졌다. 바람 소리, 물소리, 그리고 새들의 울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쿠리티바가 왜 특별한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연을 꾸민 게 아니라, 자연이 사람을 받아들인 도시였다.

도시를 걷다, 사람을 만나다

쿠리티바의 도심은 의외로 단정하고 조용했다. 브라질 특유의 활기와 소음 대신, 사람들의 발소리가 도시의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루아 다스 플로레스(Rua das Flores)’라는 보행자 전용 거리를 걸었다. 이름 그대로 거리 곳곳에 꽃이 피어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노년의 부부가 벤치에 앉아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커피 향이 바람을 타고 흘러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 뒤를 따라왔다. 그 모든 소리가 하나의 배경음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카페 ‘카페 두 파르케(Café do Parque)’에 들어갔다.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메뉴판은 손글씨로 써 있었다. 나는 브라질식 커피 한 잔과 파오 지 케이주(pão de queijo, 치즈빵)를 주문했다. 주인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여행자예요? 쿠리티바는 조용하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아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이 도시의 매력이에요. 여긴 빨리 사는 법을 잊은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 대화는 유난히 오래 남았다. 도시의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살아가는 속도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것. 쿠리티바 사람들은 시간을 쫓지 않았다. 그 대신 서로의 일상 속에서 천천히 스며드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느림이 부럽기도 하고, 어쩐지 따뜻했다.

보스케 알레망(Bosque Alemão), 고요한 오후의 숲길

점심을 마치고 ‘보스케 알레망(Bosque Alemão)’으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독일의 숲’이라는 뜻이다. 독일 이민자들의 문화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인데, 사실상 쿠리티바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책 코스였다. 숲길 초입에는 작은 목조건물이 있었고, 그 앞에서 아이들이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공원 안에는 ‘헨젤과 그레텔 하우스’라는 동화관도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나무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묘하게 어울렸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새소리가 귓가에 잔잔히 울렸다.

도시 한가운데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자동차 소리도, 광고판도, 인파도 없었다. 오직 나무와 하늘, 그리고 바람만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쿠리티바는 단순히 ‘녹색도시’가 아니라, 사람에게 ‘쉼’을 가르쳐주는 도시라고. 이곳의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삶을 되찾는 속도였다.

석양이 내린 쿠리티바, 하루의 끝에서

해 질 무렵, 나는 다시 도심으로 돌아왔다. 거리에는 주황빛이 번지고, 트램이 천천히 선로를 따라 움직였다. 그 시간의 공기에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의 평화가 담겨 있었다. 공원 벤치 위에서는 젊은 연인이 커피를 나누고 있었고, 거리의 기타리스트는 조용히 “아구아 데 마르소(Águas de Março)”를 연주하고 있었다. 브라질 특유의 보사노바 선율이 공기 속을 흐르며, 이 도시의 저녁을 더 따뜻하게 물들였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여행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풍경이 아니라, ‘삶의 온도’라는 걸. 쿠리티바의 온도는 적당히 따뜻했고, 천천히 식어가는 저녁의 빛과 닮아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지 않고,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몰랐다.

떠나는 날, 다시 느린 시간을 떠올리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 창밖으로 푸른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침 햇살에 젖은 잎사귀들이 반짝이고, 멀리 언덕 위로는 하얀 교회가 보였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쿠리티바는 여행자에게 ‘멈춤’을 선물하는 도시라고. 여기서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 길을 잃어도, 계획이 없어도, 그 자체로 완전한 여행이 된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창밖 아래로 푸른 녹지가 넓게 펼쳐졌다. 그 풍경은 마치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정원 같았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쿠리티바. 네가 가르쳐준 느림을 잊지 않을게.” 그리고 다시 일상의 도시로 돌아가야 할 내가, 잠시나마 그 느린 호흡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