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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중심부에 자리한 볼로냐는 처음엔 이름조차 낯설었다.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처럼 화려한 명성을 가진 도시는 아니지만, 묘하게 마음을 끄는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붉은 도시’라 부른다. 건물 대부분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이기도 하고, 이 도시가 오래전부터 지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품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 붉은 빛의 의미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봄날,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40분을 달려 볼로냐에 도착했다.

첫인상, 포르티코 아래를 걷다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끝없이 이어진 아치형 회랑, ‘포르티코(Portico)’였다. 볼로냐에는 이런 포르티코가 도시 전체에 40km 넘게 이어져 있다. 햇빛이 강한 낮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사람들은 그 아래를 따라 걷는다. 처음엔 단순히 건축적 장식이라 생각했는데, 걸을수록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을 느꼈다. 비를 피하는 공간이자, 사람들이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는 일상의 무대였다.
포르티코 아래를 걸으며 카페 한곳에 들렀다. 현지인들이 아침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고, 창밖으로는 빨간 지붕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이 도시의 리듬이 느려지며 내 호흡도 같이 천천해졌다. 여행이란 결국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싶었다.
피아차 마조레, 도시의 심장을 보다
볼로냐의 중심, 피아차 마조레(Piazza Maggiore)는 도시의 심장 같은 곳이다. 사방이 고딕 양식의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넵투누스 분수(Fonte di Nettuno)’가 자리한다. 나는 광장 한쪽에 앉아 분수를 바라봤다. 어린아이들이 물가를 뛰놀고, 노부부는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또 누군가는 그 앞에서 춤을 췄다. 관광지의 화려함보다는, 살아있는 도시의 온기가 느껴졌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광장 옆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Basilica di San Petronio)’이었다. 반쯤 마감된 대리석 외벽이 눈에 띄었는데, 미완의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그 안에 들어서니 어두운 공기 속으로 햇살이 한 줄기 내려와 성당의 벽면을 비췄다. 그 순간의 정적이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곳을 떠나더라도 그 장면만큼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볼로냐의 맛, 라구 소스와 함께한 저녁
볼로냐에 왔다면 꼭 맛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라구 알라 볼로네제(Ragù alla Bolognese)’.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트소스 파스타의 원조다. 해 질 무렵, 작은 식당 ‘Trattoria dal Biassanot’에 들어갔다. 붉은 벽과 나무 테이블, 그리고 오래된 와인 병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따뜻하게 웃으며 내게 자리를 내줬다.
라구 파스타가 나왔을 때, 그 향부터가 달랐다. 신선한 토마토와 고기의 깊은 풍미, 그리고 천천히 졸인 소스가 면에 스며들어 있었다. 한입 먹자마자 입안이 포근해졌다. 단순한 맛이 아닌, 정성과 시간이 만들어낸 맛이었다. 옆자리의 현지인은 나에게 와인을 한 잔 권하며 말했다. “볼로냐의 저녁은 언제나 이렇게 따뜻해야 해요.” 그 말이 괜히 마음에 와 닿았다. 낯선 도시에서의 저녁이 이렇게 포근할 줄이야.
토레 델리 아시넬리에서 내려다본 붉은 도시
다음날 아침, 나는 볼로냐의 상징인 ‘토레 델리 아시넬리(Torre degli Asinelli)’에 올랐다. 498개의 나무 계단을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하지만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피로가 사라졌다. 도시 전체가 붉은 지붕으로 덮여 있었고, 포르티코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 멀리 산자락까지 이어진 붉은빛은 마치 노을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 도시가 왜 ‘붉은 도시’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머리칼이 흩날렸지만, 그 모든 게 좋았다. 붉은 도시 위에서 맞는 바람,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차오르는 묘한 따뜻함.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 중 가장 순수한 형태가 아닐까 싶었다.
볼로냐의 밤, 그리고 작별
해질 무렵,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거리의 조명이 켜지고, 버스커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커플들이 손을 잡고 걸었고, 친구들은 피자를 나눠 먹으며 웃었다. 나도 길가 벤치에 앉아 젤라또를 먹었다. 달콤한 바닐라 맛이 혀끝을 감싸며, 오늘의 하루를 부드럽게 마무리하는 듯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결국 낯선 곳에서의 익숙함을 찾는 일 아닐까?’ 볼로냐에서 나는 그 익숙함을 찾았다. 따뜻한 커피 향, 사람들의 웃음, 붉은 벽돌에 스며든 시간. 그 모든 게 나를 편안하게 했다.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포르티코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낮보다 조용했고, 가로등 불빛이 붉은 벽돌 위로 번졌다. 그 불빛이 마치 도시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볼로냐, 고마워.” 속으로 그렇게 인사했다. 내가 머문 하루는 짧았지만, 그 하루가 주는 온도는 오래 남았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는 이 도시의 일상 속에 조금 더 섞이고 싶다. 그게 진짜 여행일지도 모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