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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는 독일에서 내가 가장 늦게 찾은 도시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라인강 근처의 세련된 도시’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발을 들이니, 이곳은 단순히 화려하거나 현대적인 곳이 아니었다. 밤하늘 아래 빛나는 라인강, 느릿한 사람들의 걸음, 그리고 예술이 일상처럼 녹아든 거리. 그 모든 게 차분하게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뒤셀도르프
뒤셀도르프

라인강변의 밤, 도시의 호흡을 따라 걷다

뒤셀도르프 여행의 시작은 라인강이었다. 해질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강변으로 향했다. 바람은 서늘했고, 물 위에는 금빛 반사가 일렁였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며 강 옆 길을 달렸다. 어느 도시나 해질녘은 아름답지만, 뒤셀도르프의 저녁은 조금 달랐다. 도시가 느리게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빛과 공기, 그리고 사람들의 온도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라인강을 따라 걷다 보면 ‘라인 타워(Rheinturm)’가 보인다.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탑은 도시의 상징처럼 보였다. 올라가면 뒤셀도르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보다 밤이 훨씬 아름답다. 강 위에 비친 조명들, 도심의 불빛, 그리고 멀리 이어진 다리까지. 나는 그날, 전망대 유리창에 얼굴을 비추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이런 도시라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 혼자라는 건 고요와 자유 사이 어딘가인데, 뒤셀도르프의 밤은 그 두 가지를 완벽히 품고 있었다.

올드타운, 맥주잔이 부딪히는 따뜻한 거리

라인강에서 조금만 걸으면 ‘알트슈타트(Altstadt, 구시가지)’가 나온다. 뒤셀도르프의 맥주, ‘알트비어(Altbier)’의 고향이기도 하다. 골목마다 전통 맥주집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퇴근 후 삼삼오오 모여 웃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앉아 작은 잔을 들었다. 쓴맛과 단맛이 섞인 알트비어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순간적으로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주인아저씨는 “여긴 작은 잔이니까 여러 번 마셔야 해요.”라며 웃었다. 그렇게 나는 셋, 넷, 다섯 잔째를 마시며, 이 도시의 리듬에 조금씩 동화되고 있었다.

술기운에 살짝 오른 얼굴로 밖에 나오니, 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좁은 골목길 위로 노란 불빛이 흘렀고, 거리의 음악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나는 벽에 기대어 그 노래를 한참이나 들었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의 음악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언어는 달라도 감정은 통한다는 걸, 그날 새삼 느꼈다.

예술의 도시, 그리고 일상의 미학

다음 날, 나는 ‘쿤스트팔라스트 미술관(Museum Kunstpalast)’을 찾았다. 사실 특별히 예술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뒤셀도르프의 미술관들은 도시의 ‘성격’을 보여주는 창문 같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고요한 공기가 흘렀다. 회색 벽면 위에 걸린 작품들, 그리고 그림 앞에 조용히 앉은 사람들. 그 모습이 오히려 예술보다 더 예술 같았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잠시 자신을 쉬게 하는 듯했다.

밖으로 나오자 가벼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뒤셀도르프의 비는 유난히 부드럽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나는 그냥 천천히 걸었다. 거리의 빵집에서는 갓 구운 프레첼 냄새가 풍겨왔고, 커피 향이 골목을 따라 퍼졌다. 그 향기 속을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졌다. 도시의 고요한 리듬이 내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 뒤셀도르프는 ‘살아있는 예술 작품’ 같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섬세하고 진짜였다.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 라인강으로 갔다. 해가 저물며 붉은 빛이 강물 위로 번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강 건너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앉아 있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잔잔한 물결이 발밑에서 흔들렸다. 이 순간이 오래 기억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건 단순한 풍경 때문이 아니었다. 뒤셀도르프는 ‘나를 멈추게 만드는 힘’을 가진 도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곳. 그것이 내가 이 도시에 반한 이유였다.

지금도 가끔 밤이 고요할 때면, 뒤셀도르프의 라인강을 떠올린다. 강가의 바람, 웃음소리, 그리고 따뜻한 조명의 색감.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작은 불빛처럼 남아 있다. 언젠가 다시 그 강변을 걸을 수 있다면, 이번엔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다. 그 사람에게 이 도시의 공기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뒤셀도르프의 밤은 그런 도시다. 혼자도 좋고, 함께라면 더 좋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