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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니우스라는 이름은 어딘가 부드럽고 시적인 울림을 갖고 있었습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의 리가와 에스토니아의 탈린이 먼저 떠올랐던 제게, 빌니우스는 조금 낯선 수도였죠. 하지만 이 도시를 직접 만났을 때, 저는 곧바로 빌니우스의 고요하면서도 따뜻한 품에 안기고 말았습니다. 화려함을 앞세우지 않고, 차분한 일상과 오래된 시간의 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도시. 그게 빌니우스의 첫인상이었습니다.
올드타운, 길 위에서 만난 중세의 숨결
빌니우스 올드타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답게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역사서 같았습니다. 돌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뒤섞인 건축물들이 이어지고, 그 안에서 카페와 작은 상점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성 안나 교회 앞에 섰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교회는 고딕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우아하고 섬세했습니다. 저는 교회 벽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보며 ‘몇 세기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며 무슨 기도를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에서는 거리 악사가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음색이 돌길을 따라 울려 퍼지며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빌니우스가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무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주피스, 자유와 예술이 숨 쉬는 작은 공화국
빌니우스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 중 하나는 단연 우주피스 공화국(Užupis Republic)이었습니다. 강을 건너 작은 다리를 지나면, 독립 선언을 한 예술가들의 자치 구역에 들어서게 되죠. 벽에는 다채로운 그래피티가 가득했고, 거리마다 조각과 예술 작품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우주피스 헌법’이 여러 언어로 새겨진 벽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할 권리가 있다”, “모든 개는 행복해야 한다” 같은 문구들을 보며 절로 미소가 났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단순한 이상일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 문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을 바라봤습니다. 화가, 음악가, 학생, 그리고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어울리는 모습은 이 도시가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실험실’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빌니우스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아마 이 자유로운 공기일 겁니다.
빌니우스의 밤, 고요함 속의 따뜻함
저녁이 되자 올드타운의 분위기는 한층 차분해졌습니다. 해가 진 뒤 조명이 켜진 성당과 광장은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관광객들로 붐비던 낮과 달리, 밤의 빌니우스는 마치 도시가 숨을 고르는 듯 고요했습니다. 저는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전통 음식인 체펠리나이(감자로 만든 만두 요리)를 주문했습니다. 투박해 보였지만 한 입 베어 물자 구수하고 든든한 맛이 입안을 채웠습니다. 옆 테이블에서는 현지인 가족이 생일을 축하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낯선 언어였지만 그 따뜻한 분위기는 제게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레스토랑을 나와 다시 강가를 걸었을 때,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듯했습니다. 이건 아마도 빌니우스라는 도시가 사람에게 주는 힘일 겁니다. 화려한 불빛이나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일상의 조각 속에서 찾아오는 작은 행복. 빌니우스의 밤은 바로 그런 순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빌니우스가 남긴 울림
빌니우스는 여행지로서 단번에 마음을 빼앗는 도시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고르다 보면, 이 도시의 매력은 서서히 스며듭니다. 올드타운의 고즈넉한 풍경, 우주피스의 자유로운 영혼, 시장과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까지. 이 모든 것이 모여 빌니우스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왜 여행을 하는 걸까?” 아마 이런 도시를 만나기 위해서일 겁니다. 내 삶의 속도와는 다른 리듬으로 흘러가는 곳에서 잠시 멈춰 서고, 그 속에서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 빌니우스는 제게 바로 그런 여행의 본질을 다시 일깨워 준 도시였습니다. 언젠가 다시 발트해를 찾는다면, 빌니우스는 반드시 또 한 번 찾아가고 싶은 곳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