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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에 자리한 코모(Como)는 ‘호수의 도시’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 여행 중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공기의 투명함이었다. 도심의 소음이 사라지고, 눈앞엔 유리처럼 맑은 호수가 있었다. 잔잔한 물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멀리 알프스 산맥의 능선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장면 하나로 모든 피로가 녹아내렸다. 나는 그날,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코모 호수를 따라 천천히 걷기로 했다.

아침의 코모, 잔잔한 물결 속 산책
이른 아침의 코모는 도시보다 자연이 먼저 깨어 있었다. 호숫가 벤치에는 새들이 앉아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조용히 조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호수 앞에 앉았다. 컵에서 올라오는 김과 호수 위의 아침 안개가 섞이는 모습이 참 평화로웠다. 멀리 보트가 천천히 지나가며 잔잔한 파문을 남겼고, 그 파문이 내 마음에도 닿는 듯했다.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면 코모 대성당(Duomo di Como)이 모습을 드러낸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고딕 양식의 성당은 이 작은 도시의 심장 같은 곳이다. 성당 앞 광장에는 아침을 여는 시장이 열리고, 상인들은 신선한 과일과 치즈를 내놓는다. 나는 한 노부부가 파는 치즈를 조금 샀다.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Buona giornata!(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행지의 인상은 결국 사람에게서 완성된다는 걸 새삼 느꼈다.
호수를 따라 걷는 오후, 바람과 햇살이 만든 길
정오 무렵, 햇살이 호수를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벨라지오(Bellagio)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위에서, 코모의 풍경은 마치 그림처럼 흘러갔다. 호수 주변에는 붉은 지붕의 집들과 초록빛 정원이 줄지어 있었다. 창가에는 화분이 놓여 있고, 흰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마저 느리게 흐를 것 같았다.
페리에서 내린 벨라지오의 거리에는 작은 골목길과 카페가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중 한 곳에 들어가 파니니와 와인을 주문했다. 카페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웠다. 호수 건너편의 산들은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물 위에는 햇살이 반짝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노신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곳은 언제 와도 변하지 않아요. 늘 같은 바람, 같은 빛.”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코모는 정말로 ‘시간이 멈춘 도시’였다.
저녁 무렵의 코모, 황금빛으로 물드는 호수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호수 위의 빛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나는 다시 코모 시내로 돌아와 호숫가 산책길을 걸었다. 물결에 반사된 빛이 얼굴을 간질였고, 그 순간 코모의 저녁 공기는 마치 포근한 담요처럼 나를 감쌌다. 한쪽에서는 젊은 연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아이들은 분수대 주위를 뛰어다녔다. 이곳의 일상은 여행자의 시선 속에서도 전혀 꾸밈이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벤치에 앉아 일몰을 바라봤다. 붉은빛이 호수를 천천히 감싸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낮게 날았다. 순간,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 도시는 사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코모의 매력은 바로 그 고요함 속에 있었다. 세상에 소리치지 않아도 존재감이 뚜렷한 도시. 그런 도시가 코모였다.
밤의 호수, 그리고 나만의 여운
밤이 되자 호숫가의 조명이 켜졌다. 물 위에 반사된 불빛들이 반짝이며 호수에 또 하나의 하늘을 만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불빛을 바라봤다. 낮의 따뜻한 햇살과는 다른, 차분하고 깊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소리, 와인잔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바람의 속삭임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호수는 여전히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머리카락을 스쳤고, 그 바람 속에 오늘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코모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그 평범함이 오히려 오래 남았다. 호수의 잔잔함처럼 마음도 고요했다. 세상엔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깊이 스며드는 도시가 있다는 걸 코모가 알려줬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도시는 화려함으로 기억되고, 어떤 도시는 냄새로, 또 어떤 도시는 빛으로 남는다. 나에게 코모는 ‘고요함’으로 남았다. 아무 말 없이 나를 위로해준 도시, 바람과 햇살, 그리고 물소리로 말을 건 도시. 그 하루가 내 삶 속에서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지금도 문득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켠이 따뜻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