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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 호수를 따라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호수 위로 햇살이 미끄러지듯 떨어질 때쯤, 마침내 ‘벨라지오(Bellagio)’라는 이름이 담긴 작은 표지판이 보입니다. 이곳은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 한가운데 자리한, 그림 속 마을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호수의 진주’라 부르는데, 실제로 와보면 그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조용하지만 풍요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그런 곳이니까요.

벨라지오

 

햇살이 머문 골목, 그 길 위를 걷다

벨라지오의 중심은 언덕 위로 이어진 돌계단 골목입니다. 가게마다 파스텔 톤의 창문이 열려 있고, 어딜 가든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납니다. 길가에 놓인 테라스 의자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다 보면, 이곳 사람들의 느릿한 리듬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저는 그날, 아무 계획도 없이 골목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좁은 골목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가, 다시 감춰졌다가를 반복하던 풍경이 참 매력적이었죠. 손에 든 젤라또는 금세 녹아버렸지만, 그 달콤한 맛은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습니다. 바람은 부드럽게 머리를 흩뜨리고, 종종 호수 쪽에서 배가 떠나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이게 바로 이탈리아의 여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의 속도를 늦춰도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지금이라는 순간을 즐기면 되는 곳. 벨라지오는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호수의 반짝임 속에서 만난 오후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코모 호수의 풍경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투명하게 열려 있고, 호수는 유리처럼 빛납니다. 배들이 느릿하게 물결을 가르며 지나가고, 반대편의 산들은 푸른 실루엣으로 둘러싸여 있죠. 저는 벤치에 앉아 그 장면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그때 마침 한 현지 노부부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호수를 바라봤습니다. 그 손끝이 참 따뜻해 보였어요. 한참을 침묵하던 그들이 “이곳은 늘 같아서 좋아”라고 말했을 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벨라지오의 매력은 바로 그 ‘변하지 않음’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이곳은 여전히 바람과 햇살이 머물던 그 자리 그대로인 것 같았습니다.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호숫가에 늘어선 식당들이 보입니다. 물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자리죠. 저는 그곳에서 리조또 한 접시와 함께 현지 와인을 주문했습니다. 입안 가득 퍼지는 크리미한 풍미와 와인의 부드러운 향이 어우러지니,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보다도 행복한 식탁이었습니다. 그저 앞에 펼쳐진 호수와 노을,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밤의 벨라지오, 조용한 호수에 스민 이야기

해가 저물면 벨라지오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호수 위에는 반짝이는 불빛들이 점점이 비치고, 골목의 가로등은 오렌지빛으로 길을 물들입니다. 저녁 산책을 나서면, 가끔 거리에서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현지 청년이 연주하는 이탈리아 노래는 낯선 외국인에게도 이상하게 익숙하게 들립니다. 저는 그날 작은 광장 벤치에 앉아 한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선율에 맞춰 눈을 감자, 낮 동안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 바람, 커피 향, 돌계단, 호수의 빛. 그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 마음속에서 천천히 녹아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여행이란 새로운 곳을 보는 일이 아니라,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는 걸요. 벨라지오에서의 하루는 제 마음속의 속도를 낮추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여유의 감각을 다시 꺼내주었습니다.

결론: 벨라지오, 조용히 머무는 시간의 선물

벨라지오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묘하게 오래 남는 도시입니다. 관광지라기보다, ‘하루쯤은 머물러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죠. 그곳의 공기,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호수 위로 번지는 햇살은 여행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돌아오는 길에 배 창밖으로 코모 호수를 바라봤습니다. 물 위에 비친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귓가를 스쳤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벨라지오는 ‘본다’기보다 ‘느끼는’ 곳이라는 걸요. 그래서 언젠가 다시 이탈리아를 찾는다면, 저는 또다시 이 마을을 향해 올 것 같습니다. 아무 약속도, 계획도 없이, 그저 바람과 햇살이 머문 그 골목을 다시 걸어보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