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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르노(Livorno)는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처음부터 넣어둔 도시는 아니었다. 피사와 피렌체 사이를 오가던 중 우연히 지도를 보다가, 바다를 끼고 있는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리보르노. 그 이름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기로 했다. 여행 중 가장 좋은 순간은 언제나 ‘계획에 없던 길’에서 찾아온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리보르노 항구, 바람 속에서 시작된 하루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짭조름한 바닷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은 상쾌했다. 리보르노는 항구도시답게 바다의 기운이 도시 전체에 스며 있었다. 오래된 창고와 선착장, 그리고 작은 어선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은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투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관광객이 몰려드는 화려한 해변은 아니지만, 그 대신 ‘진짜 삶의 냄새’가 났다. 생선을 손질하는 어부, 그물을 손보는 노인, 그리고 항구 카페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주민들. 이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이었다.
나는 방파제 끝까지 걸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들려왔다. 물결이 부서질 때마다 햇빛이 반짝였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원을 그리며 날았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의 소리보다 바다의 소리가 더 따뜻하게 들릴 때가 있다. 리보르노의 바다는 바로 그런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옆자리에는 현지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바구니에 빵과 치즈를 담고 있었고,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서툰 이탈리아어로 “정말 아름답네요”라고 답했다.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묘한 친근함이 느껴졌다. 여행지에서 언어는 종종 필요 없다. 웃음과 시선만으로도 마음이 통할 때가 있다. 그날 리보르노의 바람은 그런 온기를 품고 있었다.
리보르노의 골목, 바다 냄새가 스며든 도시
항구에서 조금 들어가면 오래된 골목이 이어진다. 벽에는 바다의 습기가 남아 있어 돌이 부드럽게 닳아 있었고, 창문마다 빨래가 걸려 있었다. 파란 셔츠, 붉은 수건, 하얀 시트들이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렸다. 그 사이를 걷는 기분은 마치 오래된 영화 속을 거니는 듯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카페와 작은 식당들이 이어지고, 문 앞에서는 사람들이 커피잔을 손에 쥐고 서로의 하루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느긋한 표정이 이 도시의 속도를 대변하고 있었다. 리보르노에는 ‘급함’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점심 무렵, 나는 운하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이곳은 ‘리틀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물길이 도심 속을 천천히 흘러간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해산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신선한 조개와 새우, 그리고 올리브오일의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한 입 먹는 순간, 바다의 짠내와 햇살이 입안에서 섞였다. 음식은 결국 ‘땅의 기억’을 품고 있다. 리보르노의 맛은 그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식당 주인이 물었다. “당신은 혼자 여행 중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리보르노의 노을을 꼭 보세요. 오늘은 하늘이 특별할 겁니다.” 그 말에 이끌리듯, 나는 다시 바다로 향했다.
노을이 물든 항구, 하루의 끝에 남은 따뜻함
저녁이 되자 하늘이 서서히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항구 근처에 앉아 해가 지는 방향을 바라봤다. 바다와 하늘이 한데 섞이며 금빛으로 빛났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오렌지빛 실루엣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하나둘 바다 쪽으로 나와 그 광경을 바라봤다. 모두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의 색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이 아주 조용해졌다. 리보르노의 바다는 ‘아름답다’는 말보다 ‘따뜻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노을이 완전히 지자 바다 위로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카페의 불빛이 켜지고, 거리의 기타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음악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나누고, 아이들은 웃으며 골목을 달렸다. 그 풍경이 참 좋았다. 어느 순간,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바다를 보고, 같은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 리보르노는 그런 ‘소박한 행복’을 꿈꾸게 하는 도시였다.
밤이 깊어지자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다. 파도는 낮보다 잔잔했고, 별빛이 물 위에 반사됐다. 나는 마지막으로 방파제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이 도시의 공기가 몸 안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여행은 때때로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리보르노에서의 하루가 바로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충만했다. 화려한 명소도, 유명한 관광지도 없었지만, 이곳에는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찾던 여행의 이유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바다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 풍경을 보며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리보르노는 내게 하나의 메시지를 남겼다.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는,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다.”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언젠가 꼭 다시 오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