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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예상보다 훨씬 조용하고, 의외로 따뜻하며, 여행자의 마음을 천천히 풀어주는 해변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바라체(Varazze)다. 이곳은 제노바나 친퀘테레처럼 유명세를 앞세운 곳은 아니지만, 실제로 발을 디디면 ‘왜 이곳을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여행지가 화려함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파도와 오래된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여유가 천천히 스며드는 도시. 그게 바로 바라체였다.

조용하지만 살아 있는 해안 도시
바라체에 도착한 첫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골목마다 흐르는 독특한 색감이었다. 리구리아 특유의 파스텔톤 건물들이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로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부드럽게 지나간다. 바람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고, 바닷물 냄새와 갓 구운 포카차 향이 섞여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큰 관광도시에서 흔히 보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드물고, 대신 천천히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 도시의 리듬은 여행자에게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여행자가 도시의 속도에 자연스럽게 발맞추게 된다.
호텔에 짐을 놓고 바로 해변으로 나갔는데, 해안길(Lungomare Europa)은 생각보다 길고 풍경이 계속 바뀌어 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해변가로 달리는 자전거 소리, 카페 테라스에서 들려오는 잔 부딪히는 소리, 해풍에 날리는 나무 잎 소리까지… 도시 전체가 하나의 느린 음악처럼 들렸다. 이 첫인상만으로 바라체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충분했다.
바라체의 골목과 해안이 주는 다층적인 매력
바라체를 여행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너무 유명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길이 거의 없어서, 골목을 걷다 보면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버린다. 골목 사이사이엔 오래된 벽화가 남아 있고, 작은 생선 가게와 와인 가게가 보이는데, 고양이가 가게 입구에 누워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그 평온함이 마음을 풀어지게 한다.
특히 리구리아 해안 특유의 좁은 골목 ‘카루제(carruggi)’는 바라체의 진짜 매력 포인트다. 돌바닥이 어색한 울림을 내며 발끝에 전해지고, 오랜 시간 동안 비와 바닷바람이 만든 벽의 색이 자연스레 바래 있다. 햇빛이 골목 위로 직접 들어오지 않아서, 걷는 동안 시원한 그늘이 이어지는 것도 좋았다. 카루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이 작은 놀라움이 바라체 여행의 큰 즐거움이었다.
해변은 부드러운 모래와 바위가 섞인 형태라서 수영을 하든 산책을 하든 즐길 수 있다. 아침에는 수영하는 노인들이 많았는데, 서로 인사를 건네며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저녁이 되면 해안길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한다. 주황색 조명이 켜지고, 파도 소리가 더 또렷해져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 하루의 피로가 녹는다. 관광 명소를 찍는 즐거움이 아니라, 도시를 천천히 ‘살아보는’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자연과 생활이 하나가 되는 도시
바라체는 화려한 편도, 강렬한 편도 아니다. 대신 ‘오래 머무르고 싶게 만드는 힘’이 분명한 도시다. 바다만 좋은 것이 아니라 주변 산책로도 아주 뛰어나다. 특히 Lungomare Europa는 리구리아 해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산책 코스다. 옛 철도길을 재정비해 만든 길이라, 산과 바다 풍경이 동시에 열린다. 자전거를 빌려 달리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길 곳곳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 지점이 나온다. 한적한 구름과 잔잔한 물결이 어울려 만들어지는 리듬은 마음을 오래 잡아두었다.
또한 이 지역의 음식은 바다 풍미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작은 식당에서 먹은 트로피에 파스타(리구리아 지역 전통 면)와 바질 향이 짙은 페스토 소스는 잊기 어려운 맛이었다. 그릇을 비우고도 계속 향이 남아서 식당을 나오며 괜히 두 번이나 뒤돌아보게 됐다. 바라체에는 이런 식당들이 많다. 과한 장식이나 SNS용 플레이팅 대신, “그냥 우리가 늘 먹던 맛으로” 내어주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저녁이 깊어지면 해안은 한층 더 고요해지는데, 파도 소리만 또렷하게 남는다. 여행 중에도 머릿속이 계속 시끄러웠는데, 그날 밤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바라체가 가진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감정만 남겨주는 도시. 자연과 일상, 여행자의 속도가 모두 어색하지 않게 섞이는 도시.
바라체 여행이 주는 여운
바라체는 여행 후에 더 생각나는 도시였다. 화려하거나 압도적인 장면은 없지만, 마음속 깊이 오래 남는 순간이 많다. 해풍이 얼굴을 스치던 감각, 좁은 골목에서 들리던 작은 웃음소리, 저녁 파도와 함께 걷던 시간… 이런 순간이 모여 바라체라는 도시의 인상이 완성된다. 여행지에 ‘편안함’을 기대한다면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다.
이곳은 과도한 관광지화에서 한발 벗어나 있고, 지역 사람들의 생활이 그대로 이어지며, 자연이 조용히 일상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바라체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잠깐의 회복 같았다. 리구리아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제노바나 친퀘테레만 볼 게 아니라, 바라체처럼 조용한 진짜 해안 도시에도 시간을 주길 강하게 추천한다. 그곳에서 당신도 아마, 아주 조용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