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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로, ‘고요함’이 만든 특별함
아말피 해안의 여러 마을을 여행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게 있습니다. 바다는 늘 찬란하고, 건물은 화사하고, 골목은 관광객들로 북적이죠. 그런데 라벨로에 도착하는 순간, 그 흐름이 갑자기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찾아옵니다. 아말피에서 굽이진 산길을 따라 버스로 올라가다 보면 바다에서 점점 멀어지는데도 strangely, 시야는 더 탁 트이고 하늘은 더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처음 라벨로의 성문을 통과했을 때, 마치 다른 시대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어요. 바람이 천천히 움직이고, 발걸음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려지는 곳—그게 라벨로의 시작이었습니다.
특히 라벨로가 특별한 이유는 ‘고요함’이라는 감정이 여행자의 속도에 그대로 스며든다는 점입니다. 아말피나 포지타노의 에너지 넘치는 풍경과 달리 이곳에서는 말수가 줄고, 주변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되고,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오래된 돌길 위를 걸을 때마다 과거의 시간들이 한 줄씩 들리는 것 같고, 오래된 성채와 정원 사이를 걷다 보면 내가 지금 어느 시대에 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주변에 몰입하게 됩니다. 라벨로는 ‘여행지’라기보다 ‘시간을 머무르게 하는 장소’에 가깝습니다.
저는 라벨로의 첫인상을 ‘기억이 천천히 내려앉는 마을’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여행을 하다 보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도 많지만, 라벨로는 반대로 속도를 줄여야만 보이는 장면들이 더 많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골목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으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 느린 리듬을 받아들이는 순간, 라벨로는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빌라 루폴로 & 빌라 치엠브로네
라벨로의 모든 매력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두 개의 빌라, 빌라 루폴로(Villa Rufolo)와 빌라 치엠브로네(Villa Cimbrone)입니다. 서로 분위기는 다르지만, 이 두 곳을 걷다 보면 라벨로라는 마을이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먼저 빌라 루폴로는 ‘음악’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는 공간입니다. 정원을 따라 걷다 보면 각도마다 다른 바다색이 보이고, 그 바다 위에 얹힌 라벨로 특유의 고요함이 공간을 더욱 깊어 보이게 만듭니다. 바그너가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완성했다는 말이 괜히 이해되는 곳이에요. 낮에는 정원에 비친 빛이 찬란하고, 저녁엔 바다색이 잔잔하게 어두워지며 풍경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반면 빌라 치엠브로네는 더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무한의 테라스(Terrace of Infinity)”는 라벨로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전망대 끝에 서면 바다와 하늘이 서로 섞이는 지점이 보이고, 그 아래로 펼쳐진 산맥과 해안선이 한 장의 그림처럼 넓게 펼쳐집니다. 바람이 불면 풍경 전체가 천천히 흔들리는 듯한 느낌까지 들어요. 여기서 바라본 아말피 해안은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던 ‘움직이는 풍경’ 그 자체였습니다.
두 빌라를 모두 걸어보고 나면 라벨로의 두 가지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는 음악처럼 감미롭고 색깔이 선명한 모습, 다른 하나는 시처럼 여백이 많고 여운이 짙은 모습. 이 두 가지가 라벨로라는 마을을 완성합니다.
라벨로에서의 느린 속도가 만들어준 ‘여행의 의미’
라벨로에서 보낸 마지막 날, 저는 아무 계획 없이 골목을 천천히 걷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명소는 꼭 가야 한다’는 압박이 따라붙을 때가 많은데, 라벨로는 오히려 그 반대를 이야기합니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러라.” 마을 전체가 이런 메시지를 품고 있는 듯했습니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작고 오래된 상점들이 있었고, 가게 주인은 여행자를 의식하지 않고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관광지 특유의 소란스러움이나 과한 상업성이 거의 없어서 마을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라벨로의 빛이 하루 종일 변주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침의 청명한 하늘, 오후의 따뜻한 금빛, 해 질 무렵의 긴 그림자. 같은 장소를 몇 번 봐도 질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미묘한 변화 때문입니다.
라벨로는 저에게 ‘여행이 왜 필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 마을이었습니다. 멋진 풍경 때문만은 아니고, 화려한 시설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여유를 되찾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도 늘 무언가를 채우려고만 했던 제 속도가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빈틈을 허용하게 되었어요.
라벨로를 떠나는 순간, 저는 이곳을 ‘다시 오고 싶은 곳’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게 될 것 같은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어떤 여행지는 기억 속에 남고, 어떤 여행지는 마음속에 남는데 라벨로는 확실히 후자였습니다. 만약 지금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르고 싶다면, 라벨로는 당신에게 가장 완벽한 속도를 선물해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