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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서쪽 끝, 아라시야마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아침, 공기가 유난히 맑고 서늘했는데, 마치 누군가 제 귀에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될 거야’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전철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눈앞에는 강과 산, 그리고 고즈넉한 일본식 마을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아, 내가 교토에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죠. 때마침 하늘도 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날씨도 좋았습니다. 커피 한잔 하면서 걷기 딱 좋은 날이라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도게츠교, 천천히 흐르는 시간 위를 걷다
아라시야마의 상징이라고 하면 단연 도게츠교입니다. 강 위로 길게 놓인 나무다리는 수백 년 동안 이 마을을 지켜온 존재 같았습니다. 여름에 갔을 때는 강물 위로 햇빛이 반짝였고, 물결 사이로 조그마한 배들이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강가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는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커플들이 보였습니다. 겨울에 다시 찾았을 땐, 하얀 눈이 다리를 덮고 강가의 나무들이 하얗게 물든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발걸음이 느려지는 건, 아마도 그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겨울도 겨울이지만 봄에 가는걸 추천합니다. 일본인들도 벚꽃을 보러 많이 갑니다.
대나무숲, 바람이 만든 음악
도게츠교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세상과 단절된 듯한 대나무숲이 나옵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대나무들이 양쪽에서 길을 감싸고 있어, 그 사이를 걷다 보면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들립니다. 저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듭니다. 바람이 대나무잎을 스치며 내는 ‘사아아’ 하는 소리는 오직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 같았고, 그 순간만큼은 도시의 소음이나 걱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른 아침, 관광객이 적을 때 걸으면 대나무숲 전체가 저만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강변과 산책로, 그리고 소소한 발견들
아라시야마의 매력은 유명한 명소뿐 아니라, 강변을 따라 이어진 작은 길과 골목에도 숨어 있습니다. 저는 우연히 한 찻집을 발견했는데, 창가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따뜻한 말차 라떼를 마시며 창밖의 강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또 길을 걷다 보면 수공예품 가게, 전통 과자를 파는 노점, 그리고 고양이 한두 마리가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는 풍경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소소한 장면들이 아라시야마 여행의 진짜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오는 길, 전철 창밖으로 스치는 강과 산을 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오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길과 이 다리와 이 숲이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꼭 보고 싶으니까.’ 아라시야마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계절과 함께 호흡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잠시나마 제 마음도 고요하게 숨 쉴 수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