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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의 내륙 도시, 베네벤토(Benevento)는 처음엔 그 이름조차 낯설었다. 나폴리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이 도시는,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묘한 공기를 풍겼다. 도시의 중심으로 들어서자마자 돌길 사이로 퍼지는 따뜻한 햇살, 오래된 벽돌 냄새, 그리고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를 맞이했다. 이곳은 관광지의 번잡함보다는, 시간의 느림과 일상의 온기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고대의 흔적 속을 걷다
베네벤토는 로마 시대부터 중요한 도시였다. 아피아 가도가 지나던 요충지였고, 지금도 그 흔적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바로 ‘트라야누스 개선문(Arco di Traiano)’이었다. 회색빛 대리석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들은 2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여전히 선명했다. 가까이 다가가 그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보자, 마치 돌이 아닌 시간 자체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관광객이 거의 없어서 더 좋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앞에 서서 햇살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문양의 그림자가 달라지는 걸 바라봤다.
그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산타 소피아 교회(Chiesa di Santa Sofia)’가 나온다. 이 교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 8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다. 외벽은 단아했고, 안으로 들어서면 차가운 돌바닥 위로 은은한 촛불 냄새가 퍼졌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들려오는 건 내 숨소리와 누군가의 발걸음뿐이었다. 종소리가 울리자, 이 도시의 시간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한순간에 겹치는 듯했다.
사람들이 만든 따뜻한 도시
베네벤토의 매력은 단순히 유적에만 있지 않다. 이곳 사람들은 느리지만 정직하게 살아간다. 오후가 되자 나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작은 바(bar)에 들어갔다. 카운터 뒤의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Caffè o vino?”라고 물었다. 나는 커피를 주문했고, 그는 에스프레소 잔을 내밀며 “여기선 설탕보다 대화가 더 달콤하지”라고 말했다. 그 말에 웃음이 났다.
그 바에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있었다. 노인은 신문을 읽고, 젊은이들은 축구 이야기를 하며 떠들었다. 낯선 여행자인 나에게도 그들은 금세 말을 걸어왔다. “왜 베네벤토야?”라는 질문에 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도시가 그리워서요.”라고 답했다. 그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이 도시는 밤이 더 예뻐. 달이 뜨면 꼭 걸어봐.”라고 조언했다. 그 말은 그날 밤 내 발걸음을 이끌었다.
달빛 아래의 골목에서
해가 완전히 지고, 도시가 어둠에 잠기자 베네벤토의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낮에는 밝고 따뜻하던 골목들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거리의 조명이 돌길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아무 목적 없이 걸었다. 작은 광장에 앉은 연인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어린아이들이 달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이 도시의 밤은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산타 소피아 근처의 작은 다리를 건너니 강이 보였다. 물결 위로 달빛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관광책자 속 유명한 명소보다, 이렇게 조용히 숨 쉬는 도시가 진짜 이탈리아의 얼굴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남긴 온기
다음 날 아침,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베네벤토의 시장은 작지만 활기찼다. 상인들이 “Buongiorno!”를 외치며 서로 인사하고, 토마토와 바질의 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갓 구운 포카치아를 한 조각 사서 입에 넣었다. 따뜻하고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단순하지만 완벽했다. 옆 가게 주인은 내게 손짓하며 “여기선 급할 게 없어요. 커피 한 잔 하고 가요.”라며 웃었다. 그 말은 이 도시를 요약하는 문장처럼 들렸다. ‘급할 게 없다.’
베네벤토에서의 이틀은 느리게, 그러나 깊게 흘렀다. 어떤 화려한 장면도 없었지만, 마음속엔 오래 남는 잔상이 생겼다. 낮의 햇살, 밤의 달빛, 그리고 사람들의 미소. 모든 것이 부드럽게 얽혀 있었다. 여행이란 결국 이런 순간을 찾는 일 아닐까. 지도 속 점 하나였던 베네벤토는 이제 내 기억 속의 따뜻한 장소가 되었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회색빛 도시 위로 아침 햇살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베네벤토는 여전히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언젠가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엔 ‘진짜 시간’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