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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Nara)는 처음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도시다. 대부분은 오사카나 교토를 먼저 떠올리니까. 하지만 일본의 고대 수도였던 나라에는 교토와는 또 다른 ‘시간의 깊이’가 흐르고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사슴공원만 생각하고 나라를 찾았지만,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나서야 이곳이 얼마나 다층적인 매력을 가진 도시인지 알게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실제 내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에서 꼭 가야 할 명소 다섯 곳을 소개하려 한다.
1. 도다이지 – 나라의 중심, 대불과 마주하는 공간
도다이지(東大寺)는 나라를 대표하는 절이자 일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사찰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대불(다이부츠)’이다. 나는 이 대불을 처음 봤을 때 한동안 말이 안 나왔다. 거대한 청동불상 앞에 서 있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냥 크기 때문이 아니다. 천천히 그 얼굴을 올려다보면 마치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봐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찰 내부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나무 구조물의 규모와 정교함, 그리고 천장 높이는 웬만한 유럽의 대성당 못지않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약 600엔이었고, 내부 사진 촬영이 가능한 것도 큰 장점이다. 오전 9시 이전에 도착하면 조용한 분위기에서 불상을 마주할 수 있다. 나처럼 혼자 여행 중이라면 이 시간대를 강력히 추천한다.
2. 나라 사슴공원 – 사슴과 사람이 공존하는 풍경
도다이지를 나와 바로 이어지는 공간이 나라 사슴공원이다. 말 그대로 공원 전체에 사슴이 돌아다닌다. 그것도 ‘야생’에 가까운 상태로. 처음에는 ‘사육되는 동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나라 시에 의해 자유롭게 방목된 상태이며, 신성한 존재로 대우받는다. 사슴과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물론 사슴센베이(전용 과자)를 들고 있으면 인사를 넘어 약간의 압박도 받게 된다.
나도 처음에 귀엽다고 느껴서 센베이를 샀는데, 네 마리에게 포위당했다. 다소 당황했지만, 먹이를 건네는 동안 그 눈망울을 들여다보니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동물’이라는 게 새삼 신기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단위 여행자에게 이곳은 최고의 체험장이다. 단순히 동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느낌이 드니까.
봄이면 벚꽃이, 가을이면 단풍이 어우러져 사슴공원은 그림처럼 변한다. 사슴, 나무, 오래된 돌길, 그리고 멀리 보이는 절의 지붕까지… 걷기만 해도 한 장의 엽서가 되는 그런 곳이다.
3. 고후쿠지 – 다섯층탑과 고즈넉함의 미학
고후쿠지(興福寺)는 나라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또 하나의 대표 사찰이다. 특히 다섯 층으로 된 목탑이 인상적이다. 나는 나라를 여행하면서 ‘높은 건물’에 대한 인상을 거의 받지 않았는데, 이 탑은 예외였다. 높다기보다 ‘균형감 있게 솟아 있다’는 느낌. 사찰 내부는 아주 조용하고 단정하다. 관광객보다 현지 어르신들이 더 많이 보인다. 바람이 불면 기왓장이 부딪치는 소리, 새가 지붕 위를 스치는 소리, 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목탁 소리까지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다.
고후쿠지의 또 다른 매력은 국보관이다. 이곳에는 아수라상 등 일본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목조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나무 특유의 향과 무거운 공기가 방문객을 맞는다. 눈을 마주치면 어쩐지 마음까지 들킨 것 같은 불상들. 감정을 표현한 듯한 조각의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곳은 나라가 단순한 ‘귀여운 도시’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장소다. 깊은 종교적, 예술적 뿌리를 체험할 수 있다.
4. 이소노카미 신궁 – 자연과 전통이 만나는 곳
이소노카미 신궁은 나라 중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조용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꼭 가볼 만한 곳이다. 붉은 기둥과 초록 지붕이 조화를 이루는 전통적인 신사 건축. 나무 계단을 올라 작은 사당 앞에 서면, 갑자기 세상이 고요해진다. 이곳은 사람보다 자연이 더 큰 목소리를 낸다. 입구에 들어서면 양 옆으로 울창한 삼나무 숲이 이어지고,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잎이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나는 이곳에 혼자 갔었는데,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걷는 동안 내 마음속에도 작은 여백이 생긴 듯했다.
일본 신사 특유의 단정함과 절제미를 가장 조용하게 느끼고 싶다면, 이소노카미 신궁은 최고의 장소다.
5. 사루사와 연못 – 나라 여행의 마무리 공간
나라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연못, 사루사와 연못. 이곳은 나라 여행의 피날레에 잘 어울리는 장소다. 해 질 무렵 연못가에 앉아 있으면, 도시의 소음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서서히 멀어진다. 연못 너머로 보이는 고후쿠지 탑의 실루엣, 바람에 흔들리는 연잎, 천천히 유영하는 잉어들. 특별한 건 없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풍경이다.
나는 이곳에 앉아 하루를 정리했다. 찍은 사진을 천천히 넘겨보고, 마음속으로 다시 그 길을 걸었다. 여행이라는 게 결국은 ‘어디를 봤느냐’보다 ‘어떻게 남겼느냐’ 아닐까. 사루사와 연못은 나라의 하루를 조용히 감싸주는 그런 공간이었다.
결론 – 나라, 조용히 스며드는 여행지
나라의 매력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니라, 천천히 걷다 보면 스며드는 ‘여백’과 ‘시간’의 결이다. 도다이지에서 느낀 위엄, 사슴공원에서의 생동감, 고후쿠지의 절제미, 이소노카미 신궁의 고요함, 사루사와 연못의 여운. 이 모든 것이 하루라는 짧은 시간 안에 담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나라를 찾는다면, 조급해하지 말고 걸어보자. 이 도시는 스스로를 먼저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조용히 다가갔을 때 문을 열어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