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할 때 대부분이 피사를 하루 일정으로만 넣는다. ‘기울어진 탑’을 보고 사진 몇 장 찍고 떠나는 도시, 그런 이미지가 강하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해 하루 이상 머물러보니, 피사는 단순한 명소 이상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탑 너머에 숨은 사람들의 일상, 느릿한 오후의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감정들. 이번 여행은 그 ‘조용한 피사’를 마주한 기억이다.

피사
피사

기울어진 탑 앞에서, 관광객이 아닌 한 사람으로 서다

피사 중앙역을 나서면 길게 뻗은 도로 끝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인다. 모두가 같은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 바로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 가까워질수록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탑을 손으로 떠받치는 포즈, 밀어내는 포즈, 누워 있는 포즈… 마치 그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웃음들이 거리마다 넘쳐났다. 나 역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막상 탑을 마주하자, 웃음보다 묘한 감정이 먼저 밀려왔다.

그 탑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대신 실제로 보니 훨씬 더 ‘기울어져’ 있었다.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긴장감 같은 게 있었다. 무너질 듯, 그러나 여전히 버티는 모습. 그게 마치 인간의 삶 같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흔들려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는 것. 나는 그 탑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종소리만이 귓가에 남았다. 그 순간, 피사의 사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인생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피사 거리의 오후, 느림 속에 스며든 삶의 온도

관광객들의 물결에서 벗어나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피사가 펼쳐진다. 좁은 돌길 양옆으로는 오래된 상점들이 있고, 창문에는 빨래가 걸려 있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어느 바(bar)에서는 현지인들이 느긋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나는 그 중 한 곳에 들어갔다. 벽에는 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주인 아저씨는 진한 이탈리아 악센트로 “Cappuccino?”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관광지가 아니에요. 진짜 피사예요.”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자전거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뛰어다녔다. 평범한 오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도시가 주는 ‘소음’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 들렸다. 커피잔을 잡은 손끝에 햇살이 닿았다. 따뜻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평범한 오후가, 사실은 가장 큰 여행의 선물일지도 몰라.’

카푸치노를 다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공기 속에는 베이커리의 버터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작은 빵집에 들러 따뜻한 브리오슈 하나를 사서 들고 걸었다. 피사의 하늘은 깊고 푸르렀다.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고,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 그 평화로운 풍경이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르노 강가에서 맞이한 노을, 여행의 진짜 순간

해질 무렵, 나는 아르노(Arno) 강가로 향했다. 피렌체를 지나 피사를 감싸며 흐르는 그 강은, 도시의 숨결 같은 존재였다. 노을이 강물 위에 비치며 금빛 물결을 만들었다. 다리 위에는 연인들, 산책하는 노인들, 그리고 혼자 앉아 기타를 치는 청년이 있었다. 바람은 부드럽고, 강물은 느리게 흘렀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하루의 빛이 사라지고, 도시가 천천히 어둠에 물드는 그 순간.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순간이 온다.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그러나 평생 기억에 남는 장면. 피사의 노을이 바로 그랬다. 관광객의 도시라 불리지만, 그 안에도 이렇게 조용하고 진한 감정이 숨어 있다. 나는 바람을 느끼며 속삭였다. “이게 진짜 피사구나.”

밤이 깊어질수록 강물 위의 불빛이 하나둘 늘어갔다. 거리의 바에서는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웃음소리를 내고, 기타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나는 강가에 앉아 마지막으로 탑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멀리서 희미하게 불빛이 비추는 사탑의 실루엣이 보였다. 여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그 모습은 어쩐지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건 아마, 불완전함 속의 균형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피사를 떠나며, 다시 생각한 ‘기울어짐’의 의미

다음 날 아침,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거리에는 빵 냄새가 퍼지고, 상점의 문이 하나둘 열렸다. 어제 그 카페 주인이 밖으로 나와 의자를 닦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Buongiorno!” 그 짧은 인사 속에서 이 도시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작지만, 진심이 담긴 도시. 피사는 그런 곳이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밖으로 마지막으로 탑이 스쳤다. 이번엔 사진을 찍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에 담았다. 피사의 탑은 여전히 기울어 있지만, 그건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견고한 존재의 증거였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 흔들리면서도 버티는 것. 그게 바로 삶이고, 여행이 아닐까.

피사는 내게 그런 교훈을 남겼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때로는 기울어진 채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말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천천히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