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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의 조용한 강가를 따라 걷다 보면, 문득 돌로 쌓은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름 그대로 ‘이시바시(石橋)’라 불리는 이 마을은, 돌다리로 유명한 작은 동네다. 처음 이곳을 찾은 건 봄이 막 시작되던 날이었다. 구마모토성의 화려함에 잠시 눈이 머물렀던 나는, 사람들로 붐비는 중심가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와 만난 게 바로 이 마을이었다. 첫인상은 단순했다. 평범한 시골 마을 같았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강과 그 위를 건너는 아치형 돌다리들이 어딘가 낡고, 또 따뜻했다.

이시바시
이시바시

돌다리 위에서 만난 느린 시간

이시바시의 돌다리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마을의 기억이 담긴 상징이다.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만든 다리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듯 단단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표면엔 수십 년의 비와 바람이 새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리 난간 위로 손을 얹자, 그 차가운 감촉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스쳐 간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시바시의 돌다리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했다. 당시엔 나무 다리가 많았지만, 홍수로 자주 무너져 돌로 만든 다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다리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쓰지이 다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강을 가로지르는 그 다리는, 보는 각도에 따라 마치 반달처럼 보였다. 나는 그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강물 위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셨고, 물 아래로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마치 느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평화로웠다.

그곳에서 만난 한 노인이 내게 말했다. “이 다리는 우리 마을의 마음이야. 예전에는 아이들이 저기서 물장구치고, 어른들이 다리 아래에서 빨래를 했지.” 그의 말 속엔 추억이 묻어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여긴 서두르지 않아도 돼.” 그 말이 그날의 모든 인상을 요약해주는 듯했다.

이시바시에서 느낀 사람의 온기

마을을 천천히 걷다 보니, 작은 찻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간판엔 손글씨로 ‘카페 하나비’라고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말차 향이 퍼졌다. 창가 자리에 앉아 돌다리를 바라보며 마차 라테를 마셨다. 주인 할머니는 내가 외국인인 걸 알아채고 서툰 영어로 말을 걸었다. “이시바시, 비유티풀, 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언어가 달라도 서로의 마음은 통한다는 걸 잠시나마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직접 만든 단팥빵을 건넸다. “서비스.” 그 한마디에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런 작은 친절은 늘 오래 기억에 남는다. 단팥빵을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팥의 맛이 입안에 퍼졌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오래된 그림엽서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시바시의 매력은 화려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함 속에서 느껴지는 여유다. 도시의 빠른 리듬에 익숙해진 나에게 이곳의 느림은 낯설었지만, 그 낯섦이 참 좋았다. 하루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게 만드는 그런 마을이었다.

돌다리가 남긴 생각, 그리고 돌아오는 길

해가 지기 시작하자 돌다리 위로 붉은 노을이 번졌다. 강물은 석양빛을 머금고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위로 날아가는 새 몇 마리가 어둑한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지만, 결국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사진으로 남기기엔 이 순간의 공기가 너무 아까웠다. 대신 눈으로, 마음으로 담아두기로 했다.

돌다리를 마지막으로 건너며 나는 생각했다. ‘이시바시’라는 이름은 단순히 장소의 이름이 아니라, 시간이 천천히 쌓인 하나의 기억 같다고. 돌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삶을 버티게 해준 세월의 조각처럼 느껴졌다. 현대적인 도시 속에서 잊고 있던 ‘느림의 가치’를 이곳에서 다시 배웠다. 빠르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돌다리 너머로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재즈 음악, 강가의 물소리, 그리고 저녁 공기의 냄새가 뒤섞였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속삭였다. “이시바시, 고마워. 오늘 하루, 정말 따뜻했어.”

돌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하늘은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여 있었고, 강 위에는 잔잔한 물결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곳을 보는 게 아니라, 잊고 있던 마음의 온도를 다시 느끼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이시바시는 내게 그 온기를 남겨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