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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시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교토나 오사카처럼 잘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었고, 오카야마 근처의 작은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직접 발을 들여놓은 순간,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구라시키는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미관지구를 걷고 있으면 ‘이 길 위를 수백 년 전에도 누군가 걸었겠지’라는 상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구라시키
구라시키

미관지구, 흘러가는 운하와 하얀 벽의 거리

구라시키 여행의 핵심은 단연 미관지구였습니다. 운하를 따라 늘어선 흰 벽의 창고들과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제가 이전에 보았던 일본의 다른 도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운하 위에는 관광객을 태운 작은 배가 천천히 떠 있었고, 노를 젓는 사람의 느린 동작은 이곳만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저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운하 옆을 따라 걸었습니다. 햇살이 물 위에 반짝였고,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가 그림자처럼 물결 위에 드리워졌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차분하고 고요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바쁘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를 건네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구라시키에서 만난 예술과 전통

미관지구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미술관과 전통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오하라 미술관**이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서양 미술관으로, 모네, 고흐, 엘 그레코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죠. 작은 지방 도시에서 이런 세계적인 작품들을 만난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미술관의 조용한 전시실을 거닐며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는 동안, 구라시키라는 도시가 가진 깊이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거리 곳곳에서는 전통 공예품 가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본식 도자기, 목공예품, 그리고 구라시키산 청색 염색 천으로 만든 소품까지. 저는 작은 손수건 하나를 샀는데, 단순한 기념품을 넘어 이 도시의 공기를 담아 간직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가게 주인 할머니는 서툰 영어로 “Enjoy Kurashiki”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어주셨습니다. 그 순간, 물건보다 더 따뜻한 마음이 제게 전해졌습니다.

구라시키의 맛과 느긋한 시간

여행지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역시 음식이죠. 구라시키에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음식점들이 많았습니다. 좁은 골목 안 작은 카페에서 마신 커피는 유난히 진하고 향기로웠습니다. 아마도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공간이라 그런지, 커피 향에 더해 옛 건물의 나무 향이 은은히 섞여 있었습니다. 점심으로는 현지인들이 추천해 준 정식을 먹었는데, 제철 생선회와 채소, 그리고 따끈한 밥이 정갈하게 담겨 나왔습니다. 투박하지도, 지나치게 꾸미지도 않은 ‘딱 그 지역의 맛’이 담겨 있어서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한 그릇 한 그릇 음미하며 먹는 동안, ‘구라시키는 여행자를 배려하는 도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사 후에는 운하 옆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었습니다. 관광객들,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 그리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주민들이 뒤섞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일상적인 모습들이 제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삶 속에 내가 잠시 스며든다’는 기분이었거든요.

구라시키가 남긴 기억

돌아오는 길에 기차 창밖을 바라보며 곱씹었습니다. 구라시키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차분하고 오래된 풍경 속에서, 저는 진짜 여행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쇼핑몰이나 고층 빌딩 대신, 이곳에는 시간이 쌓이고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골목과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여행은 때로 ‘새로운 것’을 보는 즐거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구라시키에서의 시간은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여유, 걸음을 늦추며 바라보는 풍경, 그리고 낯선 이와의 짧은 미소. 그 모든 것이 모여 구라시키는 제게 잔잔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일본을 찾게 된다면, 꼭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분명 다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