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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를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 중 하나는 바로 ‘이진칸 거리’를 걷던 그 시간이었어요. ‘이진칸(異人館)’이라는 이름부터가 독특하죠. 일본어로 이방인(異人)의 집(館)이라는 뜻인데요, 고베항이 개항하면서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서양식 저택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에요. 고베 산노미야역에서 북쪽 언덕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갑자기 공기가 바뀌는 것처럼 풍경이 달라져요. 일본 속의 유럽, 혹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고베이진칸거리

돌계단을 오르며 시작된 이진칸 탐방

산노미야에서 카페 하나 들러 커피를 한 잔 들고 천천히 이진칸 쪽으로 걸어갔어요. 도심에서 10분밖에 안 걸렸는데, 점점 경사가 생기고, 바닥은 돌로 깔린 골목이 되어가더라고요. 이진칸 거리 입구에 도착하면, 이국적인 분위기의 표지판과 함께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돼요.

계단을 한참 오르다 보면 처음 맞이하게 되는 유명한 건물이 ‘우로코노이에(비늘의 집)’예요. 붉은 벽돌과 유럽풍 지붕이 어우러진 이 건물은 외벽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요.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당시 외국인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식기, 샹들리에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어서 꼭 유럽의 어느 마을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 들어요.

혼자 방문했지만,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습도 인상적이었어요. 대부분 감성 카메라로 벽돌과 커튼 사이의 빛을 담고 있었죠. 저도 삼각대 없이 셀프 타이머로 몇 장 찍었는데, 이진칸 거리만의 따뜻한 색감 덕분에 사진이 참 잘 나왔어요.

시간이 멈춘 듯한 거리의 공기

이진칸 거리에서 가장 매력적인 건 ‘정적’이에요.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번화가와는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느낌. 차 소리도 거의 없고,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오르골 가게의 음악이 이 분위기를 더 감싸요.

저는 ‘영국관’, ‘덴마크관’, ‘라인의 집’ 같은 테마별 외국관도 둘러봤어요. 입장료는 보통 500~1000엔 사이인데, 패스권을 사면 여러 곳을 묶어서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어요. 특히 덴마크관에서는 북유럽풍 인테리어가 예뻐서 사진 욕심이 났고, 라인의 집에서는 독일 와인과 치즈에 관련된 전시가 흥미로웠어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끔씩 언덕 위로 고베 항이 내려다보이기도 해요. 그 순간, ‘이 사람들도 옛날에 이 창으로 같은 풍경을 봤겠지?’라는 생각이 들며, 이상하게도 그들의 삶과 감정이 느껴졌어요. 단순히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 시간들이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숨은 포토존과 골목의 아름다움

이진칸 거리는 크지 않지만, 구석구석 숨어 있는 포토존이 많아요. 특히 ‘풍향계의 집’ 앞에 있는 골목은 초록색 담쟁이와 붉은 벽돌, 그리고 구식 가로등이 조화를 이루는 곳인데, 인스타에서도 많이 보이는 장소죠. 그 옆에 있는 작은 카페는 창밖으로 이 거리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테이블이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고베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고소하고 차가운 맛,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유럽풍 거리의 조합. 그 장면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또 하나의 포토존은 ‘이진칸 스타벅스’예요. 역사적 건물을 개조해 만든 스타벅스로, 외관은 1900년대 초의 저택 그대로고, 내부는 스타벅스 특유의 세련됨이 가미돼 있어요. 2층 창가에 앉아 창문 너머 이진칸 골목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건 정말 영화 한 장면 같았어요. 혼자 여행 중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좋았어요.

이진칸, 일본 속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유럽

고베는 항구 도시라서 그런지, 이진칸의 분위기도 묘하게 낭만적이에요. 무언가를 정복하려 하기보다는, 조용히 남아 있는 것들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 이진칸은 유럽을 흉내 낸 공간이 아니라, 과거 그곳에 진짜 외국인들이 살았고, 지금까지 그 흔적을 잘 보존해온 곳이기에 더 진정성 있게 다가와요.

이진칸 거리의 마지막은 꼭 언덕 위 전망대에서 마무리했으면 해요. 고베 시내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뷰는 이 모든 산책을 정리해주는 한 컷이 돼요.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여행이란 결국 누군가의 일상을 내가 조용히 건너보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결론 – 시간과 감성을 걷는 거리, 이진칸

고베의 이진칸 거리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에요. 그곳은 시간, 공간, 감정이 함께 머무는 곳이고, 혼자 걷기에도 전혀 외롭지 않은 거리예요. 화려하진 않지만, 조용한 설렘이 있고,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나만의 풍경을 만들어주는 곳.

다음에 고베에 다시 가게 된다면, 저는 아마 또 이진칸을 찾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직 다 듣지 못한 이야기와, 다 담지 못한 풍경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