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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고에 도착한 건 눈이 세상을 덮은 한겨울 아침이었어요. 버스 창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마치 그림책 속 장면 같았습니다. 산 사이로 고요히 자리한 마을, 지붕마다 하얀 눈이 두텁게 쌓여 있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정말 따뜻해 보였죠. 손끝은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이상하리만큼 포근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 있을까 싶었어요.

시라카와고
시라카와고

하얀 지붕 아래의 삶, 그리고 숨결

시라카와고의 첫인상은 ‘고요함’이었어요. 사람의 발자국 소리마저 눈 속에 묻히는 듯 조용했죠. 전통 가옥인 갓쇼즈쿠리는 두 손을 합장한 듯한 지붕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경사가 눈을 흘려보내기 위한 지혜라고 하더군요. 단순히 옛집이 아니라, 눈이 많은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오랜 생활 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흔적이었습니다.

눈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 집 앞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벽 안쪽에서 장작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새어 나왔어요. 주인 할머니가 문을 열고 밖을 쓸며 저를 보더니 웃으며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습니다. 안쪽에는 화로가 있었고, 그 위에 따끈한 감자가 구워지고 있었죠. 낯선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감자 한입, 그 순간이 마을의 온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듯했습니다.

할머니는 “여긴 겨울이 길어요. 하지만 외롭진 않아요. 사람끼리 도와주며 사니까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한마디에 이 마을의 정체성이 모두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모습, 그게 바로 시라카와고가 가진 진짜 아름다움이었어요.

불빛으로 물든 마을의 밤

해가 지고 나면 시라카와고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뀝니다. 눈 위로 조명이 켜지면, 마을 전체가 은은한 빛으로 물들죠. 갓쇼즈쿠리 집들의 삼각 지붕에 따뜻한 불빛이 비치면, 마치 하얀 산 속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보입니다. 저는 전망대에 올라가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어요.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잊은 채, 그저 눈앞의 풍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 속의 공기는 묘하게 맑고 달콤했어요. 사람들은 말없이 서서 불빛을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눈밭 위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죠. 그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어떤 믿음에 가까웠어요. 눈이 덮인 마을이 주는 평화로움, 그리고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온기. 그것은 진정한 ‘겨울의 따뜻함’이었습니다.

불빛이 점점 강해지며 마을 전체가 별처럼 반짝일 때, 제 안에서도 어떤 감정이 피어올랐습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이 영원하진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졌어요. 도시에서 늘 바쁘게 살아가던 제게 시라카와고의 밤은 “괜찮아, 잠시 쉬어도 돼.”라고 속삭여주는 듯했습니다.

눈이 멈춘 다음 날, 그리고 작별

다음 날 아침, 하늘이 조금 맑아지자 마을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줬습니다. 밤새 내린 눈이 반짝이며 빛났고, 사람들은 천천히 길을 쓸며 하루를 시작했죠. 그 모습을 보면서 ‘이곳의 일상은 눈과 함께 시작되고, 눈과 함께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광객이 떠난 후에도, 이 마을의 시간은 묵묵히 흘러갑니다. 전기가 잘 통하지 않던 옛 시절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불을 피우고, 서로를 도우며 살아왔겠죠.

마지막으로 마을 입구에서 발길을 멈췄습니다. 눈이 녹아내리며 작은 물길이 생기고, 거울처럼 반짝이는 수면에 갓쇼즈쿠리의 지붕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저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떠나기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채워졌습니다.

시라카와고는 단지 ‘예쁜 마을’이 아니었어요. 그 안에는 겨울을 견디는 사람들의 인내와 온기,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화려한 관광지가 주는 자극적인 감동이 아니라, 눈처럼 조용히 내려와 마음을 덮는 따뜻함. 그게 바로 시라카와고의 진짜 매력이었죠.

버스를 타고 마을을 떠나며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아직도 하얗게 덮인 지붕들, 그 위로 내리는 눈발. 문득 ‘이곳의 사람들은 오늘도 저 불빛을 켜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어디서든, 누군가의 불빛은 누군가의 위로가 되니까요. 시라카와고의 겨울은 그렇게 제 마음속에도 조용한 불빛으로 남았습니다.

무료 이미지 참고: https://pixabay.com/ko/